1935년 8월 30일 조선총독부는 「식산계령」(제령 제12호)을 공포하였다. 총독부는 “경제생활 합리화를 통해 농민을 농촌 진흥 운동의 협조자로 만들겠다"고 그 설립 이유를 밝혔다. 즉, 식산계는 대공황 이후 조선 농촌 경제의 악화에 따른 식민 지배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마련한 대책 중 하나였다.
식산계는 부락 또는 이에 준하는 지구 안에 거주하는 사람들로 조직되었고, 계원의 경제 발달을 위한 공동 사업 운영을 목적으로 하였다.
식산계는 법인으로서 독자적인 경제 능력을 가질 수 있으므로 판매와 구매의 주체가 되었으며, 독자적인 재산을 형성할 수도 있었다. 운영을 담당하는 주사와 부주사는 계원 가운데에서 선출하였고, 감사는 금융조합이나 산업조합의 이사가 맡았다.
식산계는 설립 이후 그 수가 비약적으로 증가하였는데, 그 추이는 다음과 같다. 143개(1936년)→1,345개(1937년)→3,978개(1938년)→8,022개(1939년)→17,450개(1940년)→26,579개(1941년)→39,893개(1942년)→47,083개(1943년)→48,327개(1944년). 즉, 식산계는 10년도 되지 않아 약 338배가 증가하였고, 식산계원도 5천여 명에서 250만여 명으로 약 500배 이상 늘었다.
식산계는 외형상 계원의 경제생활을 향상시킨다는 목적을 가지고 구매 · 판매 · 이용 · 신용 사업을 경영하는 협동조합 형태로 설립되었다. 식산계 공동구매 · 판매 사업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품목은 미곡과 비료였다.
1938년 6월 말 전체 식산계의 공동구매 사업에서 비료가 76%, 공동판매 사업에서 미곡이 85%를, 1939년 6월 말에는 비료가 67%, 미곡이 90%를 각각 차지하였다. 미곡과 비료를 중심으로 공동구매 · 판매 사업이 진행된 것은 당시 농업 경영 조건에서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미곡과 비료가 중심 거래 품목이 된 것은 한편으로 경영의 안전성을 고려하여 거래 품목을 대량 거래가 가능한 품목으로 제한했기 때문이었다.
식산계는 설립과 동시에 강제적으로 금융조합 조합원으로 가입되어 금융조합의 지도를 받았다. 금융조합 이사는 계원 모집을 비롯하여 설립에 관한 모든 업무를 처리하였고 주사를 통해 식산계를 지도하였다.
식산계에 대한 금융조합의 지도 감독은 매우 엄격하였다. 식산계는 모든 금융과 물품의 구매 및 판매에 대해서 금융조합[산업조합]과 전속 거래를 해야 하였다. 전속 거래를 하기 때문에 식산계에서 쓰이는 자금은 모두 금융조합에서 차입하고 여유금은 원칙적으로 금융조합에 예입하도록 하였다. 또한 공동구매품의 매입과 물품의 판매 시에도 조합의 알선을 받아야 하였다.
그 결과 식산계 공동사업과 금융조합 자금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자금 대출 한도액은 매년 금융조합과 식산계 주사가 협의하여 결정하였는데, 이때 계원의 신용 및 자산 실태를 면밀히 조사하였다. 즉, 봄에 계원에게 공동구매 자금을 대출해 주고, 가을에 미곡을 비롯한 생산물 공동판매 대금으로 구매 자금을 회수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식산계의 성격은 조선총독부의 농촌 지배 수단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높았고, 전시 농업 정책이 실시되는 1940년 이후 식산계가 전국적으로 설립되면서 현실화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전시 농업 통제에 필요한 농촌 지역 조직으로 식산계를 활용하기 위해 적극적인 확대 방침을 실시했는데, 19371945년 사이에 설립된 식산계 중 82%가 19391943년 사이에 집중되고 있었다. 그 결과 1943년에는 전체 농가 호수의 82%가 식산계원이 되었다.
식산계는 미곡 공출 및 식량 배급 기구로 활용되는 등 농촌 지역의 물자 수집과 배급을 담당하는 경제 통제 조직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이와 같이 식산계가 경제단체에서 경제 통제 조직으로 그 성격을 전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국이 전시 동원 체제의 기본 단위인 부락 연맹과 식산계의 사업 구역을 일치시키고, 식산계 주사가 부락 연맹 이사장을 겸임하게 하면서 인적 결합을 강화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