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시대에 당나라와 교역이 성하여지게 됨에 따라서 산둥반도나 장쑤성(江蘇省) 등 신라인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곳에는 신라인의 집단거주지인 신라방(新羅坊)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 곳의 거류민들은 절을 세워 그들의 신앙의 지처로 삼은 한편 항해의 안전도 기원하였는데, 이와 같은 사찰을 신라원이라고 하였다.
신라원 가운데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흥덕왕대에 장보고(張保皐)가 산둥반도 적산촌(赤山村)에 세운 법화원(法華院)이다. 이 법화원은 신라와의 연락구실을 하는 것은 물론, 신라의 유학승과 일본의 유학승들에게까지 편의를 제공하였던 사찰이다.
1년의 수확 500석의 전답을 기본재산으로 삼았던 법화원에는 항상 30여 명의 상주승(常住僧)이 있었다고 하며, 연중행사로는 본국인 신라의 예에 따라 매년 8월 15일을 전후하여 3일 동안 성대한 축제를 열었다. 또한, 매년 정기적인 강경회(講經會)를 개최하였는데, 여름에는 『금광명경(金光明經)』을 강하고 겨울에는 『법화경』을 강하였다.
각각 2개월씩 계속된 이 강경회에는 약 250여 명의 승속(僧俗)이 참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예불(禮佛)도 신라의 것을 그대로 따라 하였는데, 『열반경』·『화엄경』·『초일월경(超日月經)』 등에서 설한 게송(偈頌)에 각각 곡을 붙여 범패(梵唄)로 불렀다고 한다.
이와 같은 신라원은 법화원 외에도 여러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나라의 백낙천(白樂天)이 자주 찾은 바 있었던 향로봉(香爐峯)의 대림사(大林寺)는 신라의 승려들만이 살았던 곳이라고 한 것 등은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