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강원도 정선에서 출생했다. 1919년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재학시 3·1운동에 참여해 체포되어 징역 6월을 선고받았다. 1924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여 역사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배재고등보통학교 교사가 되었다가, 1927년 4월 일본 유학을 가서 도호쿠(東北)제국대학 법문학부를 1930년 졸업, 바로 배재고등보통학교 교사로 복직해 1938년까지 근무하다가, 이화고등여학교 교장으로 전직했다. 특히 이화여자고등학교 교장 재직 때에는 조선총독부의 학교재단 몰수에 항거하여 한국인이 주체가 된 유하학원을 설립해 재정의 자립을 이루었다. 1920년에는 조선에스페란토협회 창립에 참여했다.
1939년 5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참사가 되었으며, 1940년에는 황도학회의 발기인 겸 회장이 되었다. 1941년에는 녹기연맹이 주최한 좌담회에 참여했으며, 9월에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경성)으로 참여했다. 1943년에는 배재중학교에서 학병 지원을 권유하는 연설을 했으며, 1944년 3월 종로총궐기위원회의 위원으로 참여했다. 이외에도 다양한 잡지와 신문에 친일적인 내용의 글을 기고했다.
해방 이후에는 1949년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반민특위에 체포됐으나 처벌받지 않았다. 1945년 10월부터 이화여자고등학교 교장이 되었으며, 1948년 새교육협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53년 이화예술고등학교를 설립, 교장이 되었다. 1954년부터 1991년까지 학교법인 상명학원의 이사 및 이사장을 역임했다. 1961년부터 1963년까지 학교법인 이화학원 상무이사를 지내다가 1963년 2월부터 1989년 5월까지 이사장을 지냈다. 이외에도 학교법인 한양학원 · 영훈학원 · 연세대학교 · 재헌학원 · 새빛학원 · 인덕학원 · 배재학당의 이사 또는 부이사장을 역임했다. 1992년 12월 27일 사망했다.
신봉조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1·13·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9: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7∼54)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5·16민족상 교육부문 본상(1979)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