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군필(君弼), 호는 호량(濠梁). 우참찬 신영(申瑛)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개성도사 신승서(申承緖)이고, 아버지는 참판 신감(申鑑)이며, 어머니는 승지 조인후(趙仁後)의 딸이다. 김상헌(金尙憲)의 문인이다.
송준길(宋浚吉)·유계(兪棨)·윤문거(尹文擧)·윤순거(尹舜擧) 등과 교유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남원부사로 있는 아버지가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자, 지리산으로 달려가서 승병(僧兵)을 이끌고 뒤따랐다.
1630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다음해에 아버지의 병이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이는 등 효심을 기울였다.
1635년에 별시(別試)에 합격자 액수에는 들었으나 당시 한쪽 사류들이 이이(李珥)·성혼(城渾)를 모욕하고, 이에 여러 선비들을 욕보이면서 더욱 신익륭을 비방하자, 전시(殿試)에 응하지 않고 과거를 단념하였다. 그 해에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를 거쳐 시직(侍直)이 되었다.
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비와 빈궁(嬪宮)·왕자들을 모시고 강화로 피난을 갔다. 적의 침공을 받아 성이 무너지고 이어서 굴욕의 강화가 성립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였으나, 봉림대군(鳳林大君: 뒤의 孝宗)을 비롯한 좌우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벼슬을 버리고 호남지방을 유랑한 지 30년만에 회덕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