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군섭(君涉). 호조참판 심우승(沈友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조판서 심액(沈詻)이고, 아버지는 심광사(沈光泗)이다. 어머니는 민환(閔桓)의 딸이다.
1675년(숙종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했으며, 1677년 2월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다.
남인으로서 같은 해 6월 서인의 영수 송시열(宋時烈)의 유배 직후에 전개된 고묘(告廟: 종묘에 어떠한 사실을 진행하겠다는 것을 알리는 예식)에 우의정 허목(許穆)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이는 예(禮)를 바로잡은 일을 종묘에 고하는 것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서인을 일망타진하려는 의도가 개재되어 있는 것이었다.
1679년 1월 부제학 이당규(李堂揆)가 홍문록(弘文錄)을 작성할 때 이한명(李漢命)·윤의제(尹義濟) 등 15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뽑혔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도당(都堂: 의정부)에서 홍문록을 작성할 때에도 역시 포함되었다.
이후 정계에서의 두드러진 활약상은 보이지 않다가, 1689년 희빈 장씨(禧嬪張氏)가 낳은 아들을 세자로 삼으려는 것에 반대하여 송시열 등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는 기사환국 이후 정계에 다시 등장하였다.
같은 해 2월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홍문관의 부수찬(副修撰)·부교리(副校理)·교리(校理)·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를 거쳐, 사인(舍人)에 이르렀다. 이후 홍문관의 여러 관직을 역임한 다음, 승지를 거쳐 1691년 7월 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8월 승지를 거쳐 9월 황해도관찰사에 이르렀다.
1694년 남인이 축출되고 소론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는 갑술환국과 함께 대사헌 이규령(李奎齡), 사간 박세준(朴世𤎱) 등의 탄핵을 받아 극변(極邊)에 유배되었다가, 1697년 3월에 유배에서 풀려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