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론인 이기론(理氣論) 및 수양론인 거경궁리설(居敬窮理說)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도 하다. 성리학자들의 심성(心性)에 관한 논의는 주희에 와서 집대성되었고, 그 이전에 맹자의 성선론(性善論)을 중심으로 한 심성 논의가 그 주류를 이루었다.
(1) 성즉리(性卽理) 주희(朱熹)에게 있어서 천지자연과 인간 존재의 통일적 해석은 성(性)에서 이루어졌다. 즉, 성이란 천리(天理), 곧 태극(太極)이 인간이라는 개별적 존재에 내재하는 것을 가리킨다.
주희는 “성이란 사람이 받은 천리이고, 천도(天道)는 천리 자연의 본체인데, 그 내용은 실제로 하나의 이(理)다.”라고 한 바와 같이, 성은 이(理) 그것으로 성 그대로가 우주의 본체와 동화(同化)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은 순수한 지선(至善)이 된다. 그러나 사람의 본성은 이와 기로써 이루어지고, 기를 떠나 이가 존재하지 않으며, 현실태(現實態)에서는 항상 기강이약(氣强理弱)이므로, 주희는 성을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나눈다.
본연지성은 천리가 사람에게 부여된 그대로의 상태, 즉 성의 본래태(本來態)를 말하고, 기질지성은 사람의 형질(形質)에 부여된 성이 기강이약 때문에 형질의 작용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 성의 현실태를 말한다. 그러므로 양자는 전연 다른 별개의 것이 아니고, 동일한 성을 두개의 다른 위상(位相)으로서 본 것이다. “기질의 성은 다만 이 성이 기질 가운데 떨어져 있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기질에 따라 자연히 하나의 성이 되는 것이다. 원초적으로 본연의 성이 없다면 이 기질의 성은 또 어디에서 올 수 있겠는가?”라고 한 데서 충분히 알 수 있다.
주희에 의하면 성선이란 본연지성의 차원에서 인간 본질을 정확하게 말한 것이다. 성악(性惡)은 기질지성의 차원에서 성의 일면만을 말한 것이므로, 기질의 작용에 방해되어 성의 본래성이 발로되지 못하고 과불급(過不及)의 편차가 있는 것인데, 이를 악(惡)이라고 본 것이다.
사람은 ‘성즉리’에 있어서의 본연지성에 의하여 사람이라고 하는 보편성이 보증되면서, 일면으로는 기질에 의한 여러 가지 한정에 의하여 천차만별의 개별성이 주어진다. 즉, 사람이 기를 받았을 때 이미 선천적으로 기질 자체의 청탁수박(淸濁粹駁)의 제약에 의하여 성현범우(聖賢凡愚)의 엄연한 구별이 주어진다. 이 기질에 한정된 것이 기질지성인데, 이것을 극복하고 본연지성을 발현시키는 곳에 주희의 도덕설 내지 수양론의 본질이 있다.
이 본연의 성의 내용을 주희는 인(仁)·의(義)·예(禮)·지(智)의 사덕(四德)이라고 한다. 원래 본연지성은 존재론적으로 이, 즉 태극이 분수(分殊)로서 사람에게 내재한다. 이것이 그 존재 그대로 어떠한 매개도 없이 당위(當爲)로서의 규범으로 정립된다. 주희는 “성이란 태극의 혼연(渾然)한 본체로서 원래 이름 붙일 수 없다. 다만 그 가운데 만가지 이치[理]를 함유하고 있는데, 대강령이 되는 것이 네 개가 있다. 그것을 인·의·예·지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이 사덕은 인간 본성에서 말한 것이고, 우주 자연의 운행에서는 『역(易)』의 원(元)·형(亨)·이(利)·정(貞)이 되고 춘(春)·하(夏)·추(秋)·동(冬)이 되기도 한다. 원이란 천지자연이 만물을 낳으려는 생성의 본질, 형은 그 신장(伸長), 이는 그 수행(遂行), 정은 그 성숙이다. 이것은 우주의 절대적인 자연율과 사덕을 동일시함으로써 도덕을 단순히 인간 사회 경험의 집적에서 추출된 행동 규범으로서가 아니고, 우주의 본체에 근거를 두고 절대화와 보편화를 이루어 우주와 덕성(德性)의 통일을 가져온 것이다.
그러나 주희는 이 사덕을 병렬하여 동등하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인에 의해 총괄시키고 있다. 이것이 이른바 ‘전언(專言)의 인’이다. 사덕은 이 전언의 인의 발현 방식을 말하는 것이 된다. 인은 인의 본체, 예는 인의 조화, 의는 인의 올바른 시행, 지는 인의 명확한 분별이 된다.
(2) 심성정(心性情) 사덕이 인간에 있어 구체적으로 어떻게 발현되는가에 있어서 심·성·정의 문제가 생긴다. 주희는 “성은 심의 이(理), 정은 심의 동(動), 심은 성·정의 주(主)”라고 규정하고 있는 바와 같이 정을 성의 발현태(發現態)로 본다. 그러나 성은 그 자체가 주도적으로 움직일 수 없고, 기, 즉 기질에 붙어서야 발현하기 때문에 당연히 기질에 의하여 한정된다. 즉, 기질의 성으로서 발현한다.
성은 체(體)이고 정은 용(用)이며, 또 성은 미발(未發)의 중(中)이고, 정은 이발(已發)의 용이기도 하다. 그리고 심이 정과 성을 주재하여 총괄하는 작용을 가진다. 따라서 “심은 사람의 신명(神明)으로서 온갖 이치를 구비하여 만사(萬事)에 응할 수 있다.”라고 하여 온갖 이치를 구비한 것은 성을, 만사에 응하는 것은 정을 가리킨다.
사덕에 대해서 말하면 인·의·예·지는 성이지만 그것이 발현되는 맹자의 이른바 사단인 측은(惻隱)·수오(羞惡)·사양(辭讓)·시비(是非)의 마음은 정이 된다. 또 이 사단이 정으로서 구체적으로 발현되는 양상에서 그것을 지탱하고 있는 본체로서의 사덕이 확실히 실재하고 있다는 것이 거꾸로 이해된다. 사덕은 성으로서 지선(至善)이지만 사단은 정이기 때문에 그 발현은 선(善)이 안 되는 경우도 있다.
정은 사단 이외에 칠정(七情)이라는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欲)도 포함한다. 따라서 성·정을 통괄하는 심의 존재가 실천적 도덕론의 중심 과제가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사단과 칠정을 둘러싸고 사칠논쟁(四七論爭)이 일어나 조선조 성리학의 중요한 이론 논쟁이 되어 왔다.
(3) 인심(人心)·도심(道心) 심은 만물 가운데 가장 맑은 기를 타고 난 인간의 가장 신명한 부위이기 때문에 “심은 기(氣)의 정상(精爽: 가장 맑은 기운)”이라고 한다. 심에 있어서 기질의 신명한 작용을 ‘허령불매(虛靈不昧)’라고 표현하는데, 우리의 인식 판단인 지각(知覺)을 주체로 삼고 있다.
주희는 이 심을 “이(理)에서 지각하는 것이 도심(道心)이고, 사욕(私慾)에서 지각하는 것이 인심(人心)이다.”라 하여 둘로 나눈다. 즉, 심의 지각이 성의 본체를 계기로 하여 발현하는 측면을 도심이라 하고, 현실의 육체상의 욕구라든가 감각을 계기로 하여 발현하는 측면을 인심이라 보는 것이다.
인심은 사욕으로 흐르기 쉬워 불안정하다. 따라서 도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도심은 인심에 가려져 미약해진 현실태에 입각하여, “인심에서 되돌아오면 곧 도심이요, 도심에서 벗어나버리면 곧 인심이다.”라고 하는 인심·도심의 긴장관계 하에서 도심을 확충하는 일만이 실천론의 목적이 되는 것이다.
도심의 확충은 또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버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한 사람의 마음인데, 도리에 합한 것이 천리이고, 정욕에 따르는 것이 인욕이다.”라고 하는 것처럼 도심을 확고히 하여 그 주재력을 충분히 발휘하게 함으로써 정욕의 방자를 제거하고 도리에 합치시키면 천리가 되는 것이다.
물론, 주희는 도심은 천리로 보지만 인심을 인욕과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인심은 인욕에 의해 촉발되는 지각일 뿐이다. 인심과 다른 인욕은 완전히 부정해야 될 성질의 것이며, 천리와는 상호 배척되고 모순되는 존재다. 따라서 “사람의 한 마음은 천리가 있으면 인욕이 없어지고, 인욕이 이기면 천리가 없어진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제거하는 공부가 문제된다. 그 실제적인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 주희의 거경궁리다.
(4) 성즉리와 심즉리 원래 심성론과 같은 인간성에 관한 문제는 중국 사상사에서 여러 가지 논의를 야기한 중요한 문제다. 이 가운데 주희는 장재(張載)의 ‘심통성정(心統性情)’, 즉 심이 성·정을 통섭(統攝)한다는 명제를 원용하여 심을 성·정으로 분석하였다.
그 이전의 대표적 심성론으로는 물론 맹자의 성선설, 순자의 성악설, 양웅(揚雄)의 선악혼합설 등이 있는데 각각 일장일단이 있었다. 무엇보다 맹자의 성선설로는 악의 기원을, 순자의 성악설로는 선의 기원을 설명하는 데에 난점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주희는 본연지성과 기질지성, 즉 인간성을 그 이상 형태와 현실 형태로 나누어, 마치 이기이원론의 구조처럼 구분하여 생각함으로써 이들 성설의 미비점을 보완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성립된 ‘성즉리’의 명제를 통해 일체의 윤리 도덕의 법칙을 인간 본성에 근거 지움으로써 윤리 도덕의 절대성·존엄성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에 의해서 ‘성즉리’의 사상이 의도한 엄숙한 도덕적 이상주의가 확립되었지만, 한편으로는 도덕이 현저히 형식화되어 갔다. 그 때문에 그에 대한 비판으로서 현실에서 살아 움직이는 심의 묘용(妙用)에 도덕의 근거를 두려는 왕수인(王守仁)의 ‘심즉리’의 사상이 출현하여 성즉리의 사상과 대립하게 되었다.
(5) 우리나라의 심성론 우리나라에서의 심성론은 먼저 주희의 이기이원적 사고방식을 충실히 계승하여 그것을 그대로 성정 문제인 사단과 칠정에 도입시킨 이황(李滉)의 학설과, 심을 이적인 것보다는 기적인 것으로 본 이기일원적 사고방식의 이이(李珥)의 학설이 각각 특색이 있으며, 그 뒤의 학자들도 대개 이 두 사람의 설을 지지 또는 반대하면서 전개해 갔다.
이황은 주희 사상의 도덕론의 측면에 주목하여 철저하게 이의 능동적 성격을 강조했는데, 이와 기의 관계를 엄격히 구분하여 이·기를 귀천(貴賤)의 관계로까지 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기론은 그의 심성론에까지도 관련되어 있다.
이황은 “사단은 이가 발현하는 데 기가 따르는 것이요, 칠정은 기가 발현하는 데 이가 타는 것이다(四端理發而氣隨之, 七情氣發而理乘之).”라 하여 사단과 칠정은 마음속에서 서로 관련은 있지만 작용의 기전(機轉)은 전연 다른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그는 “이로서 기수(氣隨)가 없으면 발현할 수 없고, 기로서 이승(理乘)이 없으면 이욕에 빠져 짐승이 된다.”고 하였다.
이렇게 보면, 이황은 이를 이성의 작용, 기를 감성의 작용으로 보아 사단과 칠정을 각각 이·기에 분속시켰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이황은 인심·도심의 대립적 관계를 인용한다. 이와 기를 귀천 관계로 보는 것도 이를 정신적 존재, 기를 감성적 존재로 보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그의 도덕론을 바탕으로 하는 이기론의 특색이 있다.
여기서 이황은 이를 이성이라고 봄으로써 능동적 성격의 것으로 파악하여 이것을 사단에 직결시키고, 이를 칠정과 엄밀히 분리하지 않으면 도덕적 실천의 근거가 애매하게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황의 이러한 심성론은 수양론에서 ‘거경(居敬)’의 중시로 나타난다.
이황의 심성론을 계승한 조선 후기의 이진상(李震相)은 왕양명과는 다른 취지의 ‘심즉리’를 주장하였다. 그는 “성이 발현하여 정이 된다(性發爲情).”는 성리학의 심성 구조론상의 명제를 바탕으로 심즉리를 말했는데, 그는 “성은 미발(未發)의 이, 정은 이발(已發)의 이다. 성이 발현하여 정이 되니, 다만 하나의 이뿐이다. 비유컨대 주인이 밖에 나가면 객(客)이 되는 것과 같으니, 다만 한 사람뿐이다. 진실로 성·정의 실상을 탐구하면 이발(理發)은 있어도 기발(氣發)은 없다.”고 하여, 주리적(主理的) 사고방식의 연장선상에서 말했다. 그러므로 그는 육왕(陸王)의 심즉리는 선가(禪家)의 “심의 작용을 성이라 한다(作用是性).”는 설과 같기 때문에 그것은 심즉리가 아니라 ‘심즉기(心卽氣)’와 같다며 반대하였다.
이렇게 이황이 이를 이성적 작용으로 파악한 데 비해서, 이이는 이성적 작용도 작용인 이상 기에 의한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사칠론(四七論)에서는 ‘기발이승(氣發理乘)’만 인정된다. 그것은 그가 이성적 작용도 감성적 작용도 그 물리적 주체를 모두 기로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이는 인심·도심은 대립적 관계에 있지만 사단·칠정의 관계에서 사단은 칠정에 포함된다고 본다. 그러므로 이이에게 있어서는 칠정은 인심·도심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 된다.
이이의 ‘기발이승’의 사고방식은 결과적으로 ‘심시기(心是氣)’라고 주장하게 되는데, 이것이 주희가 “심이란 기의 정상이다”라고 한 데서 연원함은 물론이다. 이이의 ‘심시기’의 명제는 주기파(主氣派) 계열의 송시열(宋時烈)·한원진(韓元震)·임성주(任聖周) 등으로 계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