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남일(南一), 호는 덕홍(德弘). 전라남도 함평 출신. 일찍이 면장·향교장의(鄕校掌議)·도의사(道議事), 서당의 훈장을 지낸 향반(鄕班)이었다.
1905년 소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의병장 김율(金聿)의 부장이 되어 장성·영광·함평·남원·보성·장흥 등지에서 항일전을 전개해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07년 8월 한국군이 강제 해산된 뒤 호남 일대에서 의진이 구성되자, 강무경(姜武景)과 협의하고 의병을 훈련한 뒤 11월 1일 함평군 신광면에서 거의(擧義),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선봉장에 강무경·임만선(任萬善)·장인보(張仁甫), 중군장에 안찬재(安贊在)·박사화(朴士化), 후군장에 노병우(盧炳友)·나성화(羅聖化)·최우평(崔友平)·김성재(金聖載) 등이었다. 그 밖에 도통장(都統將)·통장·군량장·호군장·기군장(起軍將)·서기 겸 모사(書記兼謀事)·도포(都砲)·도집사·모사 등으로 의진을 구성하고, 군기를 엄하게 하였다.
1908년 3월 7일 강진군 오치동에서 일본군 수십명을 살상하고 다수의 무기를 노획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4월 15일 장흥의 일본군이 습격해오자 곽암(藿巖) 밑에 잠복해 적 3명을 사살하였다. 6월 19일 판촌(坂村)에 유진 중 후군장 노병우가 노구두(老狗頭)로 나아가 일본군을 기습해 적 5명을 사살하고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였다.
7월 30일 영암 사촌(沙村)에서 적장 이하 10여 명을 사살하였다. 그 뒤 장흥의 대치(大峙)와 해남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병으로 인해 통수권을 부장에게 넘겼다. 1909년 3월 다시 의병을 일으켜 남평·풍치(風峙)일대에서 크게 접전했으나 전세가 불리해 후퇴하였다.
5월 12일 보성 석호산(石虎山)에서 의병장 안규홍(安圭洪)과 의진 연합을 모색하는 한편, 내습해 오는 적 5명을 사살하였다. 그 뒤 의병을 해산하라는 조칙을 받고 7월 21일 해산하였다. 그 뒤 능주(綾州)에서 강무경과 신병치료 중 함께 잡혀 강무경은 곧 총살되고, 심수택은 12월에 대구감옥으로 이감되어 다음 해 7월 교수형을 당하였다.
많은 우국시를 남겼고, 의병활동에 관한 『진지록(盡知錄)』과 『접전일기』가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