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자장(子章), 호는 창주(滄洲). 참봉 심현(沈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감찰 심종범(沈宗範)이고, 아버지는 심탁(沈倬)이다. 어머니는 음성 박씨(陰城朴氏)로 박유령(朴有寧)의 딸이다. 정엽(鄭曄)의 문인이다.
광해군 때 폐모론이 일어나자 아버지와 함께 이를 반대하고, 1618년(광해군 10) 동학유생(東學儒生)으로 조경기(趙慶起) 등 8인과 함께 폐모론을 주도하는 이위경(李偉卿)·정조(鄭造)·윤인(尹訒) 등을 극형에 처하도록 상소하였으나, 아버지와 함께 문외출송(門外黜送: 성문 밖으로 쫓겨남)되었다.
아버지가 죽은 뒤 횡성 산골로 낙향하였다.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1624년(인조 2)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629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학유를 지내고, 뒤에 한림에 들어갔다.
그 뒤 사서(司書)·정언(正言)·부수찬(副修撰)·지평(持平) 등의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1636년 병자호란 전에 청나라와 절교하고 자강책(自强策)을 강구하여 대비하자고 주장했으며, 태인현감으로 있을 때 병자호란을 만났다.
병자호란 후에는 종묘령(宗廟令)을 거쳐 1640년 평창군수가 되었으나, 태인현감 때 왕명 사신을 쫓아버렸다는 혐의를 입어 체직되었다. 1647년 다시 부교리(副校理)·교리·겸찬독(兼贊讀) 등의 요직을 거쳤다. 1650년(효종 1)에 응교(應敎)로서 『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집의로 억울하게 귀양 간 유계(兪啓)의 무죄를 상소하였다. 1653년 홍처후(洪處厚)와 함께 서경(書經)의 「무일편(無逸篇)」과 시경(詩經)의 「칠월편(七月篇)」을 베껴 병풍으로 만들어 왕에게 바쳐 효종의 총애를 입었으며, 이어 승지가 되었다. 호조·병조·공조의 참의를 역임하고 연안부사로 있다가 고향에 돌아가 죽었다.
심지한은 특히 『주역』 등을 즐겼다. 『시경』·『서경』·『대학』·『주례』의 골자를 따서 『사도(四圖)』를 편찬하고, 효종에게 바쳐 상으로 호피(虎皮)를 하사 받기도 하였다. 저서로 『창주집(滄洲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