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백구(伯懼), 호는 일송(一松) 혹은 수뢰루인(水雷累人). 장령(掌令) 심순문(沈順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동지동녕부사 심봉원(沈夆源)이고, 아버지는 정자(正字) 심건(沈鍵)이다. 어머니는 이연경(李延慶)의 딸이다. 노수신(盧守愼)의 문인이다.
1570년(선조 3)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이 해 이황(李滉)이 죽자 성균관을 대표하여 장례에 참여하였다. 1572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보임되고 1583년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89년 헌납(獻納)으로 있을 때 정여립(鄭汝立)의 옥사가 확대되는 것을 막으려했으나, 조정과 뜻이 맞지 않아 한때 사임했다. 이듬해 부응교(副應敎)가 되었다. 1591년에는 응교로서 선위사(宣慰使)가 되어 동래에서 일본사신을 맞았으며, 이어 간관이 되어 여러 차례 직언을 하다 선조의 비위에 거슬려 사성(司成)으로 전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의주로 선조를 호종하여 도승지로 승진하고, 대사헌이 되었다. 때마침 명나라 조사(詔使)가 오자 다시 도승지가 되어 응접했는데, 이는 중국어를 잘 했기 때문이다. 이 해 겨울 형조판서를 거쳐 호조판서가 되어 명나라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의 접반사(接伴使)로서 오래도록 서도(西道)에 있었으며, 송응창을 설득하여 관서의 기민 구제(飢民救濟)에 진력하였다.
1599년 예문관제학·예조판서를 거쳐 이조판서가 되고, 홍문관·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하였다. 안으로는 사명(辭命: 왕명의 전달)을 장악하고 밖으로는 외국 사신의 접대에 힘썼다. 좌찬성·우찬성 등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뽑혔다.
1606년 성균관에서 익명의 투서가 나왔는데, 선조가 이를 색출하기 위해 유생들의 심문을 고집하자 그 불가함을 말해 뜻을 관철시켰으며, 그 해 가을 좌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선조의 생부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을 추숭하려 하자, 예전(禮典)에 어긋남을 강력하게 표하여 논의를 중지시켰다.
1608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다시 좌의정으로 재상에 올랐다. 그러나 권신 이이첨(李爾瞻) 등이 국정을 장악하여 임해군(臨海君)을 극형에 처하려 하자 그 부당함을 주장하였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가 일어나 부원군 김제남(金悌男)이 죽고 이이첨 등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옥사의 주모자로 몰아 해치려 하자, 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 등과 강력하게 그 부당성을 논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듬해 영창대군의 처형은 인륜에 어긋나며, 가해자인 강화부사 정항(鄭沆)을 참수하라고 주장하다가 광해군의 노여움을 산 정온(鄭蘊)을 적극 변호하여 귀양에 그치게 하였다.
1615년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있을 때,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허균(許筠)과 중국 야사(野史)에 나타난 종계문제(宗系問題)로 다투다가 궐외로 축출되었다. 이듬해 폐모론이 다시 일자, 둔지산(屯之山)에 은거하여 『주역』을 읽고 시를 읊으며 자신의 지조를 지켰다. 1620년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나가지 않았다.
문장에 능하고 글씨를 잘 썼으며, 저서로 『일송집』이 있다. 상주의 봉암사(鳳巖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