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신사지 석비 ( )

목차
관련 정보
광주광역시 십신사지 석비 정측면
광주광역시 십신사지 석비 정측면
건축
유적
문화재
광주광역시 북구에 있는 조선전기 에 건립된 비. 범자비. 시도유형문화재.
목차
정의
광주광역시 북구에 있는 조선전기 에 건립된 비. 범자비. 시도유형문화재.
내용

1986년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 석비는 십신사지에 있던 것을 1977년 현 위치에 이전 복원한 것이다. 십신사는 고려 문종대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 광산현조에 ‘十信寺 在縣北五里 平地有梵字碑(십신사 재현북오리 평지유범자비)’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중종대까지는 존속했던 것으로 보이나 그 이후의 폐사 경위에 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 비는 옥개석 일부가 결실되었을 뿐 비신과 귀부가 완전히 갖추어진 것이다. 비의 규모는 총고 5.15m, 길이 2.98m, 너비 1.68m의 지대석 위에 길이 2.73m, 너비 1.32m의 귀부를 놓고, 그 위에 길이 3.96m, 너비 0.98m, 두께 0.5m의 비신을 결구한 다음 높이 0.35m인 옥개석을 올려놓았다. 비신의 상단부에 길이 83㎝, 너비 68㎝로 구획을 만들고 보주와 같은 문양을 새겨 놓았는데, 이 문양은 범자의 옴(唵)자를 도안화한 것이다. 이로 인해 사서에 범자비로 기록되어 있다.

비의 제호는 범자문양 밑에 가로로 ‘大佛頂尊勝陀羅尼幢(대불정존승다라니당)’이라 오목새김되어 있어, 이 비가 불정존승다라니경을 세긴 경당(經幢)임을 알 수 있다. 비문은 한자로 오목새김하였는데, 석질이 약하고 마멸이 심하여 판독이 힘들지만 대개 총 9행으로, 1행 31∼32자를 음각하였으며 제9행의 말미에 ‘丁巳(정사)’란 간지가 있다.

옥개석은 전형적인 이수(螭首) 대신에 조선시대 민묘 앞에 보이는 팔작지붕을 하고 있고, 귀부는 거대한 몸집에 비해 지나치게 움츠러들어 왜소해진 거북의 머리가 도식화되고, 간략화된 귀갑의 표현이나 평면처리된 다리 모습 등으로 보아 조선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비의 건립 연대는 비문 끝부분에 있는 ‘정사년’이란 간지와 조선 초기의 작품인 점으로 미루어 세종 19년(1437) 또는 연산군 3년(1497년)으로 비정할 수 있어 15세기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 비에 새겨진 ‘대불정존승다라니당’이란 문자와 같은 불당을 새긴 예로는 황해도 해주와 평안북도 용천의 〈대불정다라니당〉이 있고 개성 선죽교와 평양 범수교의 교재에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증심사범자칠층석탑의 경우도 이러한 경당으로서의 성격을 갖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고 있다.

불정존승다라니경은 존승법(尊勝法)이라고도 하는데 그 내용은 석가여래불정으로부터 출현한 불정존승을 본존불로 삼고 ‘존승다라니’를 외우면서 얽매여 있는 일체의 생각이나 미망에서 벗어나려는 밀교의 수도법이며 또한 질병을 막거나 장수 등을 기원하는 현세구복적인 기도법이다.

이 석비도 이러한 경의 내용이나 기도법에 관한 것을 기록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불교의 한 계통인 밀교의 진리를 설법하는 비문을 새긴 범자비로서 남한에서는 처음 확인된 것이다.

참고문헌

「광주(光州) 십신사지(十信寺址) 범자비(梵字碑) 및 석불이전(石佛移轉) 시말」(최몽룡, 『고고미술』, 138·139, 1978)
『광주(光州)의 불적』(박춘규·천득찬, 광주직할시, 1990)
집필자
이영문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