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군에서는 3월 11일 안성읍내의 독립만세운동을 발단으로, 죽산·양성·원곡면 일대에서 연이어서 격렬히 전개되었다.
읍내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30일 윤순철(尹順哲)·고성준(高成俊)·한국초(韓國初) 등이 주동이 되어 태극기 70장을 만들어 이 날 오후 장터에서 200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튿날 오후에는 주동섭(朱東燮)·한삼석(韓三石)·권업동(權業同) 등이 주동이 되어 주민들과 함께 동산에 올라가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안성군내의 가장 크고 격렬한 만세운동은 양성면과 원곡면의 합동시위였다. 처음에는 각각 별도로 만세운동을 전개했으나, 성면에서 합류하였다.
4월 1일 오후 8시경, 이유석(李裕奭)·홍창섭(洪昌燮)·최은식(崔殷植) 등이 1, 000여 명의 원곡면민들을 주동해 외가천리에 있는 면사무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면장을 선두에 내세워 횃불을 들고 양성면으로 시위행진하였다.
이들은 도중에 양성면에 있는 경찰관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하고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경찰관주재소 앞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고 귀가하던 1,000여 명의 양성면민과 합류, 시위군중은 2,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이들은 경찰관주재소와 숙직실을 습격, 방화하고 일본경찰에게 두루마기를 입히고 끌고 다니며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였다.
이어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습격해 기물을 파괴, 방화한 뒤 우편소를 파괴하였다. 또한, 인근 주재소와의 연락을 두절시키기 위해 전신주 3개를 도끼로 찍어 쓰러뜨렸다. 또, 면사무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괴하고 뒷산으로 올라가 독립만세를 삼창한 뒤 해산하였다.
이튿날 새벽 4시에 귀향한 원곡면민들은 다시 원곡면사무소를 파괴, 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만세운동 때 잡혀 옥고를 치른 사람만도 126명이나 되었다.
한편, 이죽면에서는 이기훈(李起薰)·윤상구(尹商求)·이응식(李應植)·최창달(崔昌達) 등이 주동이 되어 4월 1일 도로개수 부역에 나온 10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일죽면에서는 4월 2일 오순경(吳順景)·조성행(趙聖行) 등이 200여명의 주민을 동원해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