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 · 1976년 경주 안압지의 발굴을 통해서 통일신라 직후에서부터 신라 말에 이르는 각 시기의 불상들이 다량으로 소개되었는데, 크게 금동판불(金銅板佛)과 원불상(圓佛像)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밖에도 완전한 불상으로서의 형상은 갖추지 않았으나 다수의 광배 편과 불상의 광배 장식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화불(化佛) 및 보주(寶珠), 천개(天蓋) 등이 아울러 출토되었다.
특히 길이가 15㎝나 되는 금동제 불이(佛耳)는 당시 안압지 불상 가운데 제일 큰 등신불(等身佛)이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자아낸다. 아울러 이 불상이 궁궐 내의 예배 중심이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발견된 금동판불들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2006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일반적으로 판불이라면 금동의 작은 판면(板面)에 불보살 등의 형상을 표현한 것을 일컫는다. 대개 단독상 혹은 그보다는 복잡하게 삼존, 오존 등이 혼합되어 나타나고 여러 가지 장식성이 가미되는 경우도 있다.
안압지 금동판불 10점은 형식상 삼존상 2점과 보살 단독상 8점으로 대별할 수 있다. 전체적인 형태는 보주형의 거신광배(擧身光背)가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불신을 에워싸고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모든 모서리가 동일한 평면의 판형(板形)을 이루고 있다. 불상은 0.3㎝ 정도의 얇은 두께로 조각되어 있으나 사실적인 입체감이 살아 있다.
다만 세부적인 불상의 자세나 문양 배치, 조각 수법, 주조 처리 등이 부분적으로 차이를 보인다. 또한 불상의 앉은 자세에 따라, 왼발을 먼저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놓은 다음 오른발로 왼다리를 누르고 앉는 길상좌(吉祥坐)는 삼존상 1점과 보살상 6점이 있고, 그 반대 방법의 항마좌는 삼존상 1점과 보살상 2점이 있다.
삼존상 가운데 길상좌의 불상은 머리카락이 소발(素髮)이며, 높은 육계(肉髻)를 가졌다. 목에는 삼도(三道)의 표현이 뚜렷하다. 얼굴은 비교적 통통한 편으로 눈은 가늘게 감은 듯하며 눈썹은 반원을 이루는데, 그 위에 음각선이 선명히 새겨져 있다. 양미간을 따라 코가 시작되고 얼굴에 비하여 작은 입은 예리하게 각선으로 처리되어 있다. 입술 끝이 약간 들어간 것이 미소를 느끼게 한다.
옷은 통견(通肩)이다. 목 깃에 반전(反轉)이 있는 굽타식의 U자형 옷주름이 배 부분에서 한결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배의 양감(量感)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대체로 옷자락 무늬가 세련되었을 뿐 아니라 당당한 몸의 굴곡을 강조하면서 긴장감을 느낄 수 있는 사실적인 조각 기법을 표현하고 있다. 수인(手印)은 전법륜인(轉法輪印)을 결하고 있다. 전법륜인은 부처가 설법하는 모습을 나타낸 수인으로 5세기 인도 굽타시대 사르나트 지역의 초전법륜상 등에서도 찾아 볼 수 있으며, 중국 당(唐)시대의 돈황막고굴(敦煌莫高窟) 벽면에 그려진 아미타관련 변상도 등의 본존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또한 일본에서도 호류지(法隆寺) 금당 벽화와 헌납보물 198호 등에서 확인되고 있어 7∼8세기 동아시아 삼국에서 전법륜인의 불좌상이 다수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법륜인은 인도에서는 처음으로 설법하는 석가모니불상의 수인으로 주로 등장한 반면 한국, 중국, 일본에서는 석가 이외에 아미타불상 등에서도 등장하고 있으므로 불상의 존명은 명확하지 않다.
양협시보살은 본존을 향해 허리를 한껏 휘어지게 한 삼곡(三曲) 자세를 취하고 좌우대칭으로 서 있다. 거의 나형(裸形)으로서 사슬 모양의 목걸이 외에는 장식이 없는 반면 천의(天衣) 자락을 어깨에 두르고 있다.
머리는 눈썹 선을 중심으로 하여 위로 빗어 올렸고, 그 중앙을 꽃 모양의 띠로 간단히 묶어서 육계처럼 높이 솟아 보이게 하였다. 귀 아랫부분의 머리카락은 두 가닥으로 땋아 천의 자락 위로 흘러내리게 하였다. 두 손은 본존 쪽의 것을 가슴까지 들어서 손가락을 맞대고 손바닥을 보이게 하였으며 반대쪽 손으로는 활짝 핀 연꽃을 받들고 있다.
대좌는 앙련(仰蓮)의 외엽이 아래로 퍼져 복련(覆蓮)의 형태를 취한 연화좌인데, 한 송이의 만개한 연꽃 속에 본존불이 앉아 있는 듯 꽃잎이 매우 입체적으로 처리되어 있다. 그 좌우로 보살의 한쪽 발만 놓여 있는 대좌의 일부가 별도로 표현되어 일광삼존불(一光三尊佛)의 구도 배치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적극적인 수법이 엿보인다.
광배는 대좌와 마찬가지로 삼존상에 각각 원형의 두광(頭光)을 두르고 이를 둘러싼 거신광(擧身光)이 보주형을 이루면서 대좌 밑에까지 이어져 있다. 내부 장식으로는 고사리형의 불꽃무늬와 덩굴무늬, 화형무늬 등이 좌우대칭으로 조화를 이루며 투각(透刻)되어 있다.
위의 삼존판불과 함께 예배되었으리라 생각되는 8구의 독존의 보살좌상은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하고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합장한 자세이다. 삼존판불의 협시보살상과 얼굴 모양이나 머리 표현, 목걸이 장식, 반나형의 신체 등이 매우 유사하다. 그리고 앙련과 복련이 맞닿은 연화대좌도 동일한 유형이다. 그렇지만 목걸이에 이어진 영락 장식이 고식(古式)의 X자형으로 교차되어 무릎 아래로 늘어져 있는 점이 크게 다르다.
삼존판불과는 달리 보살판불의 광배는 독특한 형식을 취하였다. 이중의 거신광배가 보주형을 이루긴 하나 그 내부에 천의 자락을 휘날리게 표현하였다. 그리고 그 주위에 길게 뻗은 불꽃심이 타오르는 듯한 불꽃무늬를 투각하였다.
안압지의 금동판불에는 용도를 짐작하게 하는 중요한 흔적이 남아 있다. 바로 광배 주연부를 따라서 뚫려 있는 8개의 못 자국과 하단의 촉(鏃)이 그것이다. 복원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안압지의 판불은 하단의 촉을 불감(佛龕)의 대(臺)에 고정시킨 다음 뒷벽 면에 동정(銅釘)으로 광배를 부착시켰으리라 생각된다. 비슷한 시기의 압출판불(押出板佛)로 잘 알려진 호류지(法隆寺)의 불감 내에 안치된 판불도 같은 방식으로 되어 있다.
불감과 관련된 귀중한 유물로서 ‘佛龕第一(불감제일)’이라 음각된 옻칠의 소형 목제판이 안압지에서 출토되었는데, 이도 또한 이러한 추정을 잘 뒷받침해 주고 있다.
양식적인 측면에서 안압지의 판불은 인도나 중국의 새로운 사실적 양식을 수용하여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신라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신라 특유의 아름다움과 분위기가 잘 표현되어 있다. 그러므로 10점의 판불은 궁궐에서 동시에 제작된 7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보인다. 그 시기는 대개 674년의 안압지 조성과 679년의 동궁 창건에 대한 기록에 이어 발굴 시 수습된 명문(銘文) 기와의 ‘의봉4년(儀鳳四年, 679년)’, ‘조로2년(調露二年, 680년)’과 때를 같이한다.
원불상으로는 건물지 부근에서 30㎝ 내외의 크고 작은 7구의 금동불상(불좌상 1구, 불입상 6구)이 출토되었다. 높이 8.9㎝의 금동불좌상은 그 중 초기 양식을 보이고 있다. 연화대좌와 불신은 한 벌로 주조되어 있다. 연화대좌와 불신에 부착되어 있는 광배는 단조법(鍛造法)을 이용하였다. 즉, 동판을 불꽃무늬로 오려내고, 그 외곽을 점선으로 축조(蹴彫)하였다.
이 불상은 삼국시대의 불상에서 일반적으로 보이는 소발의 머리에 낮은 육계를 보인다. 둥근 얼굴에는 고졸한 미소가 흐르고 있다. 통견의 법의는 두꺼운 옷주름을 드러낸 채 마주잡은 두 손을 덮고 있다. 뒷면은 거의 평평하며 허리 부분에 꼭지가 달려 있다. 이로써 광배의 장식에 사용되었던 화불의 하나로 추측된다.
금동불입상들은 통일신라시대 이전 시기에 걸쳐 제작된 작품으로 모두 광배를 잃었고 3구만 대좌를 지니고 있다. 상의 표현에 있어서 5구의 불상은 존명이 불확실한 시무외(施無畏) · 여원인(與願印)의 통인을 하고 있다. 그러나 나머지 1구의 불상은 비로자나불을 표하는 지권인(智拳印)을 나타내고 있다.
머리카락은 소발과 나발(螺髮)이 섞여서 나타난다. 얼굴은 시대가 내려올수록 통일신라시대 후기 조각의 특징인 미소가 사라지는 대신 표정이 없는 근엄한 모습이 된다. 그리고 귀 끝이 약간 밖으로 휘어진다. 초기에 보이던 굴곡이 강하고 풍만한 신체는 선각(線刻)으로 된 옷주름의 표시로 점차 형식화되어 간다.
이 입상들은 또한 주물(鑄物) 솜씨가 차츰 퇴화됨에 따라 거칠어질 뿐 아니라 조잡함을 드러낸다. 뒷면의 처리에 있어서도 청동을 아끼려고 구멍을 더욱 확대해 가는 경향이 나타난다. 그리하여 광배를 부착시키기 위한 꼭지가 차차 어깨 부근까지 올라가게 된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비로자나불상처럼 판불에 가까울 정도의 납작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대좌에는 입체적인 장식성이 부각된다. 귀꽃이 돌출하고 팔각기단에는 안상(眼像)이 투조되는 등 화려한 모습이 나타난다. 개별적으로 출토된 다수의 광배 편에도 이러한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
안압지 발굴 시에 수습된 불상 및 불교 유품들은 궁중 불교의 정도를 알려 주는 자료이다. 그리고 불교 의식과 불교적 시설물인 내불당(內佛堂)에서 사용된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형식을 달리하는 다양한 불상들은 통일신라시대의 불상 연구에 큰 도움이 되며 양식적으로 7세기 말 통일신라와 중국, 일본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국제적인 조각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독특한 판불의 형식과 양식이 일본의 압출불 성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맡았음도 주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