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 가평리 주거지 ( )

선사문화
유적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손양면에 있는 석기시대 이후 집터 관련 유물산포지. 생활유적.
이칭
이칭
가평리 철기시대유적
정의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손양면에 있는 석기시대 이후 집터 관련 유물산포지. 생활유적.
개설

1983년 강릉대학박물관에 의해 원삼국시대 주거지 2기가 발굴조사되었으며, 또 그 바로 옆 동쪽과, 이곳에서 남쪽으로 약 150m 떨어진 곳에서 1994~1996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의해 신석기시대 주거지 2기와 초기철기시대~원삼국시대의 주거지 3기가 발굴조사되었다. 유적은 양양 남대천 하류의 남쪽 해변 사구지대에 위치한다. 주변으로는 서남쪽에 낮은 구릉의 산이 분포하고 동쪽으로는 유적에서 약 200m 거리에 동해바다가 펼쳐져 있다. 서북쪽으로 약 1㎞ 거리에 오산리 유적이 있다.

내용

1983년 조사된 원삼국시대 유구는 주거지 2기이다. 1호 주거지는 평면 철(凸)자형으로 길이 750㎝, 너비 710㎝의 방형에, 남쪽 가운데에 출입구가 돌출되었다. 바닥에는 두께 8∼17㎝의 진흙다짐을 했으며, 동북모서리에 노지(爐址)가 있다. 노지는 부뚜막과 시설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길이 20∼30㎝, 두께 5㎝ 정도의 벽돌모양의 돌이 10여 개 흩어져 있다. 동남모서리에는 저장혈이 있다. 유물은 평저형 소형 무문토기 · 발형토기 · 원저호 · 방추차 · 숫돌 · 철편 등이 출토되었다. 2호 주거지는 평면 철(凸)자형으로 길이 460㎝, 너비 430㎝의 방형에 남쪽 가운데에 출입구가 돌출되었다. 바닥에는 15㎝ 두께의 진흙다짐을 했으며, 불에 탄 기둥과 갈대 등이 다량으로 확인되었다. 동북모서리에 노지가 있는데, 부뚜막 같은 시설로 판단된다. 유물은 다량의 무문토기편과 파수부호 · 적갈색 타날문토기편 · 철편 등이 출토되었다. 이 두 주거지의 조성 시기는 서기 1세기 전반대로 추정된다.

1994~1996년 조사된 신석기시대 유구는 주거지 2기, 야외노지 3기이다. 1호 주거지는 평면 말각방형으로 길이 850㎝, 너비 800㎝, 깊이 40㎝의 대형이며, 장축방향은 북서-남동향이다. 동남편에 2m이상 돌출부가 있는데, 출입구로 추정된다. 바닥은 약 10㎝ 두께로 진흙다짐을 하였고 가운데에 노지가 있다. 가장자리에는 불에 탄 나무와 갈대가 확인되었으며, 주거지 내․외에서 주혈들이 확인되었다. 유물은 압인문 · 어골문 · 점렬문의 빗살무늬토기편과 화살촉 · 갈돌 · 갈판 · 석부 · 어망추 · 탄화된 씨앗 등이 출토되었다. 2호 주거지는 벽선이나 바닥 윤곽선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바닥 깊이는 약 35㎝이다. 내부 가운데에 노지가 있으며, 그 외곽 네 곳에 주혈이 있다. 노지는 20~30㎝ 크기의 할석들을 장방형으로 배치하였고 내부는 수혈식으로 만들었다. 유구 주변에서 빗살무늬토기편 · 돌도끼 · 어망추 등이 출토되었다.

야외노지의 경우, 1 · 2호는 지름 120㎝, 100㎝ 크기의 평면 원형으로 인접하여 배치되었다. 할석들이 무질서하게 놓여 있으며 내부에서 목탄과 탄화된 도토리가 출토되었다. 3호는 지름 약 100㎝의 평면 원형으로 할석과 천석이 불규칙하게 놓여 있다. 내부에는 목탄이 있으며, 주변에서 빗살무늬토기편과 무문양 토기편이 출토되었다. 주거지와 야외노지의 조성 시기는 서기전 3000~2000년경으로 추정된다.

1994~1996년 조사된 초기철기시대~원삼국시대 유구는 주거지 3기이다. 1호는 결실되어 바닥면만 일부 남아있는데, 잔존크기는 남북 340㎝, 동서 240㎝ 정도이다. 바닥에는 약 10㎝의 진흙을 깔았다. 2호는 장축방향은 북서-남동향이며, 평면 여(呂)자형으로 전체 크기는 장축 10.5m, 단축 5.5m이다. 북쪽 큰 방은 장축 620㎝, 단축 550㎝, 깊이 50~65㎝의 크기이다. 남쪽 작은 방은 장축 340㎝, 단축 210㎝의 크기이다. 두 방 모두 바닥에 진흙을 깔았으며, 서로 연결하는 통로는 길이 약 170㎝, 너비 약 140㎝, 깊이 10~30㎝의 크기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경사져 있고, 바닥에 진흙을 얕게 깔았다. 큰방 가운데에 화덕이 있으며, 주거지 내 · 외부에서 주혈이 조사되었다. 또 내부에서 불에 탄 판자와 나무 및 갈대, 보리와 콩들이 조사되었다. 유물은 적갈색 경질무문토기 · 흑색마연토기 · 타날문토기와 철겸 · 철도자 · 철촉 등이 출토되었다. 3호 주거지는 대부분 파괴되어 형태를 알 수 없으며, 잔존크기는 장축 380㎝, 단축 340㎝이다. 바닥에는 진흙다짐을 하였으며, 가운데에 노지가 있다. 내부에서 불에 탄 판자와 나무가 노출되었다. 유물은 적갈색 경질무문토기․관옥이 출토되었다. 이 주거지의 조성 시기는 서기전 2세기~서기 2세기로 추정된다.

의의와 평가

강원도 중부지역의 신석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원삼국시대의 주거문화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고고학적 자료이다. 특히 초기철기시대~원삼국시대 주거지에서 다량의 탄화곡물(콩, 보리)이 확인되어 당시의 농경문화도 살펴볼 수 있다.

참고문헌

『문화유적분포지도: 양양군』(강원문화재연구소, 2003)
『한국고고학사전』(국립문화재연구소, 2001)
『양양 가평리』(국립문화재연구소, 1999)
『양양군의 역사와 문화유적』(강릉대학교 박물관, 1994)
『양양군가평리주거지발굴조사보고』Ⅰ(강릉대학박물관,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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