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 역내리 고분 ( )

선사문화
유적
강원특별자치도 홍천군 두촌면에 있는 삼국시대 굴식돌방무덤 · 앞트기식돌방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정의
강원특별자치도 홍천군 두촌면에 있는 삼국시대 굴식돌방무덤 · 앞트기식돌방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개설

홍천역내리고분은 2002년 강원문화재연구소에 의해 시굴조사되어 삼국시대 고분이 확인되었으며, 2003년 같은 연구소에 의해 발굴조사되었다. 고분군은 가리산 줄기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뻗어 내린 낮은 구릉의 사면 말단부에 위치한다. 그 앞쪽인 동쪽으로는 장남천이 북동에서 남서로 흐르고 주변에는 좁고 길게 뻗은 충적대지가 분포한다. 고분은 9호 석실분을 제외하고는 군집을 이루어 조영되었는데, 봉토는 대부분 삭평되었다.

역사적 변천

북한강 유역의 홍천, 춘천 등 영서지방은 3세기대에는 백제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으며, 4세기 말경부터 고구려의 영향 아래에 놓였다. 홍천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벌력천현으로 고구려에 속하였으며, 637년(선덕왕 6)에 신라의 속지가 되고 경덕왕 때 녹효현으로 바뀌어 삭주의 영현이 되었다. 신라는 551년(진흥왕 12)에 죽령 이북의 10개군을, 백제는 한강 유역을 회복한다. 553년에는 신라가 백제의 동북지역 영토를 빼앗아 신주를 설치한 후 삼국통일을 이룰 때까지 지배하였다. 이로 보아 홍천지역도 6세기부터 신라의 영향 아래에 놓인 것 같다.

내용

유적에서는 석실분 14기가 조사되었는데, 1호는 횡혈식 석실분이며, 나머지 13기는 횡구식 석실분이다. 장축방향은 모두 등고선과 직교하며, 평면 형태는 5호 석실분만 세장방형이고 나머지는 모두 장방형이다.

1호는 북서-남동향으로 석실 크기는 길이 176㎝, 너비 125㎝, 깊이 120㎝이다. 봉토 지름이 670㎝이고 시상은 서벽과 북벽, 남벽에 붙여 작은 할석으로 1단만 깔았다. 천장부는 판상할석으로 3단을 덮었는데, 2단까지는 네 모서리를 줄인 후 맨 위에 판상할석 1매를 얹었다. 연도는 우편재로 길이 150㎝, 너비 57㎝, 높이 80㎝이며, 석실과 연도의 경계부에 문틀시설을 하고, 판상할석 1매로 폐쇄하였다. 유물은 철환 · 토기편이 출토되었다.

2호는 북동-남서향으로 석실 크기는 길이 126㎝, 너비 62㎝, 깊이 65㎝이다. 호석 지름이 약 250㎝이고, 벽체는 종․횡평적으로 축조하였으며, 개석은 판상석으로 덮었다. 시상은 바닥 중앙에 자갈을 깔았다. 유물은 완 · 철촉 · 철도자 등이 출토되었다.

3호는 북동-남서향이며, 석실 크기는 길이 260㎝, 너비 130㎝, 깊이 110㎝이다. 호석 지름은 약 470㎝, 벽석은 8~9단으로 축조되었으며, 양 장벽이 내경한다. 부장품은 북단벽과 동장벽 중앙에서 유개부가구연장경호 등의 토기류와 청동 대금구 · 집게형 철기 등이 출토되었다.

4호는 북서-남동향이며, 석실 크기는 길이 270㎝, 너비 103㎝, 깊이 116㎝이다. 벽체는 할석과 강돌로 6~7단 쌓았고, 시상은 바닥 전체에 강자갈로 한 겹 깔았다. 북쪽 단벽에는 부장공간이 마련되었는데, 병 등의 토기류와 방추차 · 철도자가 출토되었다.

5호는북동-남서향으로 석실 크기는 230㎝, 너비 76㎝, 깊이 85㎝이다. 횡구부는 유단식이며, 남단벽은 2단까지 종평적했고, 그 위에 판석 2매를 세워 막았다.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6호는 북동-남서향으로 석실 크기는 길이 240㎝, 너비 116㎝, 깊이 100㎝이다. 천장은 판석으로 덮었고, 벽석은 7~8단으로 축조하였다. 횡구부는 남벽에 판석 2매를 세워 막았다. 유물은 병 등 토기류와 은제 이식 · 철도자 · 동곳이 출토되었다.

7호는 북동-남서향으로 호석 지름은 약 340㎝이다. 석실 크기는 길이 300㎝, 너비 130㎝, 깊이 146㎝이다. 벽석은 6~7단이 남아 있고, 북단벽은 양 장벽과 맞물리게 하면서 모줄임하였다. 남단벽은 3단까지 할석을 쌓고, 그 위에 판석 1매를 세워쌓기로 막았다. 북단벽에 부장공간이 있다. 유물은 유개고배 등 토기류와 청동 대금구 · 관정 등이 출토되었다.

8호는 북서-남동향으로 호석 지름은 약 300㎝이다. 석실 크기는 길이 235㎝, 너비 87㎝, 깊이 80㎝이다. 벽석은 7단으로 축조되었고 벽체는 약간 내경한다. 천장은 판석 5매로 덮었고, 석실 바닥에는 시상을 자갈로 한 겹 깔았다. 횡구부는 유단식이고 판석 2매로 세워 막았다. 유물은 완 · 동곳이 출토되었다.

9호는 북서-남동향으로 석실 크기는 길이 218㎝, 너비 115㎝, 깊이 56㎝이며, 벽석은 3단 정도만 잔존한다. 횡구부는 훼손되어 확인할 수 없다. 시상은 자갈을 전면에 한 겹 깔았으며, 북 단벽에 부장공간이 있다. 유물은 유개고배․병 등 토기류와 방추차가 출토되었다.

10호는 동북-서남향으로 호석 지름 약 500㎝이다. 석실 크기는 길이 243㎝, 너비 108㎝, 깊이 115㎝이다. 천장은 판석 6매로 덮었고, 횡구부는 판석 1매로 세워 막았다. 유물은 동단벽쪽에서 출토되었으며, 북장벽에서도 토기류와 인골 2개체 분이 수습되었다.

11호는 북동-남서향으로 호석 지름 약 480㎝이고 천장은 판석 5매로 덮었다. 석실 크기는 길이 264㎝, 너비 112㎝, 깊이 110㎝이다. 횡구부는 유단식이고 그 위에 판석 3매를 세워 막았다. 시상은 석실 전체에 자갈을 깔아 만들었고, 벽석은 내경한다. 북단벽에 인접해서 토기가 출토되었으며, 봉토 속에서도 대부완 · 개 등 토기가 수습되었다.

12호는 북서-남동향으로 석실 크기는 길이 317㎝, 너비 112㎝, 깊이 108㎝이다. 벽석은 1단은 종평적을, 그 위로는 횡평적을 주로 하면서 6단 정도 쌓았다. 양 장벽은 내경하고, 횡구부는 유단식으로 판석 2매로 세워 막았다. 시상은 석실 바닥 전체에 할석을 깔았고, 북벽 주변에 부장공간을 만들어 병 등의 토기를 두었다.

13호는 북동-남서향으로 석실 크기는 길이 213㎝, 너비 80㎝, 깊이 58㎝이다. 벽석은 6~7단이며, 천장은 판석 5매로 덮었다. 횡구부는 유단식이고 시상은 강돌로 바닥 전체에 한 겹으로 깔았고 북단벽에서 토기 2점이 출토되었다.

14호는 북동-남서향으로 석실 크기는 길이 128㎝, 너비 45㎝, 깊이 50㎝의 소형이며, 호석 일부가 남아 있다. 횡구부는 판석 1매를 세워 막았다. 토기와 관정이 출토되었다.

축조 시기는 12호의 부가구연장경호와 개가 가장 이른 6세기 후반경이며, 6 · 10 · 11호는 개와 고배로 보아 7세기 초반, 3 · 7 · 14호는 개와 부가구연장경호로 보아 가장 늦은 7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특히 3 · 7호의 당식 대금구는 7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특징

홍천역내리고분은 산의 경사면에 입지하고 구조적으로는 횡혈식과 횡구식으로 나뉜다. 횡구식의 경우 입구부분이 유단식이고 천장은 평천장이며 석실 장단비는 한강 본류역 및 남한강 유역 신라 석실분보다 세장하고 면적은 좁다는 특징이 있다. 특히 5 · 6 · 8 · 10~14호는 평천장으로 대부분의 횡구식은 신라 고분이나, 1호는 모줄임이나 말각조정 방식의 천장 구조로 고구려 석실분의 특징을 갖는다. 조사자는 이 1호를 8세기 중엽으로 추정되는 신라 토기편이 수습되고 문틀시설로 보아 신라 고분으로 볼 수 도 있으나, 춘천에서 확인된 고구려 석실분들과 구조적 유사성을 들어 신라에 귀속한 고구려 세력 혹은 고구려계 유민이 축조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황보경도 고구려인이 축조한 것으로 보면서도 다른 석실분들이 조성되는 과정 중에 신라인이 1호를 재사용한 것으로 보았다.

의의와 평가

홍천역내리고분은 홍천지역에서 최초로 조사된 신라 고분으로 홍천뿐만 아니라 가평, 춘천 중에서도 가장 많은 신라 고분이 발굴조사된 곳이다. 신라가 6세기 진흥왕대 한강 본류역을 점령하고 영서지방으로 그 세력을 뻗쳤는데, 북한강 유역의 홍천역내리고분에서 이 시기와 맞물리는 신라 고분이 확인되어 이를 입증하는 고고자료가 되었다. 또한 3 · 7호의 당식 대금구와 10호의 녹유가 시유된 합 등의 유물은 고분 조영집단이 신라에 의해 관직을 수여받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고고자료로 신라의 영역확장과정에서 홍천지역이 중요한 거점으로 활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홍천 역내리 고분군: 국도 44호선(구성포~어른간) 도로 확․포장공사구역내 유적 발굴조사 보고서(Ⅱ)』(강원문화재연구소, 2005)
「4~6세기 북한강 유역 고분의 특징과 축조배경 고찰」(황보경, 『고구려발해연구』 37,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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