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출생. 1929년 서울 주교공립보통학교를 마치고 중앙청년학교에 입학해 김종태(金鍾泰)에게 유화를 배우면서 그림을 시작하였다. 중앙청년학교를 중퇴한 뒤 「소년상」(1932), 「좌상」(1933) 등의 유화작품을 발표하면서 서양화단에 진출했다.
1931년 서화협회전람회(약칭 협전)와 1937년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에서 입선하였다. 1936년부터 1938년에는 같은 청년 유화가들인 홍순문(洪淳文), 송정훈(宋政勳), 최규만(崔奎晩), 한홍택(韓弘澤) 등과 녹과전(綠果展)이란 이름의 동인 작품전을 가졌다.
생계를 위해 1932년에 서울동양옵세트 인쇄회사에 화공으로 취직하였고, 1936년부터 1939년까지 제약회사 유한양행(柳韓洋行) 도안부에서 미술부장으로 근무하였다. 1939년 임군홍이 머물고 있던 중국 한커우(漢口)로 가서 미술광고사에서 함께 간판과 선전화를 제작하였다. 이 무렵 3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광복 직후 귀국하여, 1946년서울에서 이종무(李種武), 신홍휴(申鴻休), 임군홍, 한홍택 등과 ‘양화 6인전’을 개최하여 작가적 위상을 높였으며, 또 한홍택, 이완석(李完錫), 조능식(趙能植) 등이 조직하였던 조선산업미술가협회전(朝鮮産業美術家協會展)에도 가담하여 도안과 선전화 활동을 지속하였다.
1947년에는 양화가 단체인 조선미술문화협회(朝鮮美術文化協會) 창립에도 동참하여 이쾌대(李快大), 이인성(李仁星), 임군홍, 한홍택, 조병덕(趙炳悳), 손응성(孫應星) 등과 함께 1949년까지 협회전을 가지며 활발한 작품활동을 보였다.
그러나 1950년 6·25전쟁 초기 남침한 북한체제의 서울미술제작소 초상화반에서 ‘김일성 초상’ 등을 그리다가 9·28 서울수복 때 월북하였다. 1951년부터 1953년까지 조선미술제작소와 농민신문사에서, 1953년부터 1955년까지 조선미술가동맹의 현역미술가로 활동하였다. 1955년부터는 출판부문에서 활약하였다. 북한에서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유화 외에 각종 포스터의 선전화 활동을 많이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