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6년 일본인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조사한 뒤 인근의 매룡리고분군과 동일시되거나 혼동되어 왔다.
그러나 1987∼1988년도에 한림대학교박물관에 의해 매룡리고분군이 조사되면서 양자간의 관계가 분명해졌다. 이 곳은 일제시대에 모두 10기의 고분이 확인되었고 그 중 3기가 발굴 조사되었다.
모두 할석으로 축조된 횡혈식석실분으로서 봉토의 크기는 지름 10m 내외이다. 구조 파악이 비교적 용이한 제1호분(昭和二年度 古蹟調査報告에는 매룡리 2호분으로 표기됨)의 경우, 현실의 평면형태는 동서로 긴 장방형이며 남벽의 중앙에 연도가 딸린 T자형 구조를 하고 있다. 연도 바닥은 현실바닥보다 한 단 높게 축조되었으며, 현실의 벽석 사이에는 회를 채운 흔적이 있다.
현실의 동서 양쪽에는 할석으로 만들어진 시상(屍床)이 1개씩 있다. 서쪽 시상에 3개, 동쪽 시상에 2개, 도합 5개의 석침(石枕)이 놓여 있다. 석침은 평평한 돌의 한 면에 사람의 머리나 목의 윤곽을 새기고 그 안을 파낸 것이다. 이러한 다수의 석침은 추가장에 의한 가족묘의 증거이다.
다른 고분도 전체적으로 1호분과 유사한 구조적 특징을 갖고 있다. 다만 2호분의 경우는 말각천장을 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상리고분군의 성격을 밝혀줄 출토유물은 극히 빈약한 편이다. 다만, 1호분에서 금동이식(金銅耳飾) 2점과 도자(刀子) 2점이 나왔을 뿐이다.
그런데 시상을 만들고 석침을 이용한 장법(葬法)은 경주지역의 횡혈식석실분에서 자주 보이는 양상으로, 상리고분의 성격규명에 도움이 된다. 아울러 말각천장 요소가 보이는 것은 이 지역이 한동안 고구려의 세력권 아래에 놓였던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고분군은 인근의 매룡리고분군과 함께 고구려ㆍ백제ㆍ신라 등 3국의 문화가 융합되던 이 지역의 특이한 양상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연대는 7세기부터 통일신라시대에 걸친 것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