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법화전』에 의하면 연광은 수(隋) 인수(仁壽, 601~604) 연간에 천태 지의(天台智顗)의 문하에 들어갔다. 어린 나이에 출가한 그는 중국으로 가서 천태종(天台宗) 승려 지의(智顗)의 제자가 되었다. 연광은 당시 법화묘전(法華妙典)을 널리 펼치고 있던 지의의 문하에서 열심히 수학하여 수년 뒤에 대오(大悟)하였고, 스승 지의로부터 증오(證悟)를 인가받았다. 그 뒤 연광은 『법화경』 강설을 허락받고 개당(開堂)하게 된다. 그의 강설에 당대의 이름 있는 고승과 석학들이 모두 감복하였다. 훗날 연광은 천태별원(天台別院)에서 묘관(妙觀)을 더욱 힘써 닦았다.
하루는 여러 사람이 연광의 앞에 나타나 “천제(天帝)께서 강경(講經)을 청한다”라고 하니 연광이 이를 허락하였다. 천제에게 『법화경』을 강설하였다는 10여 일 동안 연광의 육신은 기절한 채 있다가 깨어났는데, 그 시간 동안 그의 안색은 평상시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그 뒤 귀국길에 오른 연광이 여러 사람들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 가운데에 이르렀을 때, 배가 갑자기 멈추었다. 이때 어떤 사람이 다가와서 “해신(海神)이 궁중으로 청하여 『법화경』의 설법을 듣고자 함이오.”라고 하였다. 이에 연광은 일행과 함께 용궁으로 들어가 경을 설하였다. 해신에게서 진기한 선물을 받은 연광은 다시 배에 올라 귀국하였다. 그는 신라에서도 항상 『법화경』을 강설하며 사람들을 교화시켰다. 연광은 어릴 때부터 매일 『법화경』을 한 편씩 독송(讀誦)하는 것을 일과로 삼았으며, 자신의 목숨이 다할 때까지 『법화경』을 독송하는 일을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고 한다.
연광의 생애는 대부분 영이(靈異)로 얽혀 있다. 이러한 그의 전기는 신라의 법화신앙(法華信仰)을 살펴볼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이야기이다. 다만 연광의 전기에는 그가 수나라로 간 때가 601∼604년 인수 연간(仁壽年間)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그의 스승인 지의는 597년에 입적하였으므로 연광이 수나라로 간 시기에는 모순이 있다. 지의가 법화묘전을 널리 펼치던 시절에 연광이 수나라로 갔다고 알려져 있으니, 그가 유학을 간 시기는 581∼600년의 개황 연간(開皇年間)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80세에 입적한 연광을 화장하였을 때 그의 혀만은 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 소문을 들은 온 나라의 사람들이 모두 희귀한 일이라며 감탄하였다. 이에 연회의 누이 두 사람이 그 혀를 거두어 공양하였다. 그 혀는 때때로 『법화경』을 독송하는 소리를 내었으며, 연회의 누이들이 모르는 글자가 있어 혀에게 물어 보면 모두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