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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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할 때 볼에 바르는 붉은 빛깔의 안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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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화장할 때 볼에 바르는 붉은 빛깔의 안료.
내용

이마에 동그랗게 치레하는 것을 곤지라고 하는데 이것 역시 연지를 사용한다. 연지화장의 최초기록은 서기전 1150년경 중국 은(殷)나라의 주왕(紂王) 때이니까 약 3,000년의 역사를 지닌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언제부터 연지를 치레에 이용하였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신라의 여인들이 연지화장을 하였다고 한다.

5, 6세기경에 축조되었으리라는 수산리 소재의 고구려 벽화 인물상에도 볼과 입술이 발라져 있다. 따라서 우리 나라에서도 1,500∼2,000년 전쯤부터 사용된 것이 확실하다. 연지 화장의 유래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 샤머니즘 문화권에서는 주색축귀(朱色逐鬼) 속신(俗信)을 신봉한바, 주색금기(朱色禁忌)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이 가장 보편화되어 있다.

이밖에 중국에서 후궁들이 생리중일 때 임금을 모시지 못한다는 표시로 뺨에 연지를 발랐다는 설이 있다. 또 중국 오(吳)나라의 손화(孫和)라는 사람의 부인이 뺨의 상처를 치료하느라고 흰 수달피 분말에 옥가루와 호박가루를 섞어 바른바, 붉은 흉터가 아름다워 보인 까닭에 치장인 줄 착각하여 부인들이 모방하였다는 설이 있다.

또 원시시대의 남자들이 날짐승을 잡은 용맹을 과시하기 위하여 입가에 묻은 피를 닦지 않고 다닌 데서 유래하였다는 설도 있다. 한편, 우리 나라 여인들의 연지 화장유래에 대하여 이익(李瀷)과 이규경(李圭景)은 흉노(匈奴)의 고유습속이 중국에 전래되고, 다시 우리 나라에 전래되었다고 하였다. 최남선(崔南善)은 ≪고사통 故事通≫에서 몽고족의 습속이 고려시대에 전래되었다고 단언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들은 모두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은나라는 동이족이 세운 국가이므로 3,000여 년 전쯤 우리 나라를 포함한 동이족에게 보편화된 고유 치장수단이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고구려 벽화의 인물상이 연지화장을 하고 있으며, 고구려의 악공(樂工)이 이마에 연지를 발랐다.

또 신라의 여인들이 연지화장한 사실에 미루어볼 때, 원(元)나라에서 고려에 전래되었다는 최남선의 주장도 틀린 것이다. 단오에 비녀 끝에 연지를 발라 재액을 물리치고, 일부 산간지방에서 전염병이 돌 때에 예방수단으로 이마에 연지를 칠하거나 붉은 색종이를 오려 붙이는 관습이 있었다. 농촌에서 밭일하기 전에 발톱에 봉숭아 꽃물을 입혀 무사하기를 기대한 관습이 있다.

이를 근거 삼아 주색금기 때문에 볼과 입술에 연지를 발랐다는 설이 강한 설득력을 지녀왔다. 그러나 신부가 연지화장을 하되, 재혼하는 경우 볼과 이마에 연지를 바르지 않는 것을 보면 주색금기와 관련지어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며, 젊음의 상징행위라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여성이 가장 젊음이 충만할 때인 14, 15세에 이르면 누구든지 저절로 뺨이 홍조를 띤다고 한다.

또 힘이 왕성한 남자, 다시 말해 영웅은 입술이 붉다 못해 검붉다고 표현해왔다. 그러므로 연지화장은 젊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며, 처녀·신부의 연지·곤지는 숫처녀임을 과시하는 수단이라고 추측된다. 연지를 만드는 재료는 잇꽃과 주사(朱砂)이다. 신라에서는 잇꽃으로 연지를 만들고, 고구려에서는 주사로 만들었다.

주사로 만든 연지는 단지(丹脂)라고도 부르는데, 잇꽃연지에 비하여 색깔이 선명한 장점이 있으나 장기간 사용할 경우 부작용, 즉 단독(丹毒)이 우려되었다. 잇꽃은 주사연지보다 사용하기 불편한 단점이 있다. 잇꽃의 꽃잎을 여러 차례 찧어 홍색소를 분리시켜 만드는데, 환약처럼 만들어두었다가 기름에 개어 발랐다.

조선시대에 궁중에서 주사로 연지를 만들던 방법은 다음과 같다. 날계란 두 개를 구멍을 내어 흰자를 모두 빼낸 다음, 노란자위 두개를 한 껍데기 속에 넣고 휘저어 융합이 되면 주사 2돈, 명반 2돈을 뭉글게 갈아 사향을 조금 넣어 한꺼번에 완전히 섞은 다음 그것을 계란 껍데기 속에 넣고 다시 열 번 가량 휘젓는다.

계란 껍데기를 절반으로 잘라 약이 든 계란의 위를 덮고 솜으로 싸서 단단히 맨 다음, 생초 주머니에 넣어서 제즙을 안친 솥 안의 공중에 매달고 반나절을 끓이다가 꺼내어 식히고 껍데기를 버린 뒤, 다시 빻으면 새빨간 색소가 된다. 이는 뺨에 잘 발라지고 붉은 색이 선명하며, 윤이 났다고 한다.

참고문헌

『한국화장문화사(韓國化粧文化史)』(전완길, 열화당,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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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전완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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