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4년(인조 22) 3월 황헌(黃憲)·이원로(李元老) 등은 심기원·이일원(李一元)·권의(權澺) 등이 인조를 제거하고 회은군 덕인(懷恩君德仁)을 왕으로 추대하려 한다고 고변하여 구인후(具仁垕)·김류(金瑬) 등이 이들 역당들을 체포, 처형하였다.
심기원사건은 같은 훈신 사이에 있었던 군사권의 쟁탈, 반청(反淸)·친청(親淸)의 정쟁적 성격을 띠고 있는 것으로, 결국 친청의 김류·김자점(金自點) 등이 승리한 사건이다. 이 때 역모사건을 다스리는 데 공을 세운 사람으로서 처음에는 1등에 구인후·김류·황헌·이원로 등 4명, 2등에 신경호(申景琥), 3등에 여이재(呂爾載)·정부현(鄭傅賢)·이계영(李季榮) 등을 책정하였다.
그러나 대간(臺諫)이 공신책봉에 이의를 제기, 그 부당함을 말하여 그 해 6월 다시 책정하였는데, 1등은 구인후·김류 등 2인으로 효충분위병기결책영국공신(效忠奮威炳幾決策寧國功臣)이라 하였고, 2등의 황헌·이원로에게는 효충분위병기영국공신이라 하였다.
공신으로 1·2등만 책정하고 3등은 모두 삭제하였는데, 이는 태종 때의 정사공신(定社功臣)에 3등이 없다는 홍서봉(洪瑞鳳) 등의 주장에 따랐기 때문이다. 그 밖의 사람들은 2년 뒤에 영국원종공신(寧國原從功臣) 1,655인 가운데에 포함시켰다.
영국공신에 책록된 구인후는 숭록대부(崇祿大夫)로 가자(加資)되고 황헌은 회흥군(檜興君), 이원로는 완양군(完陽君)에 각각 봉군되었으며 모두 가의대부(嘉義大夫)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