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륭 ()

고려시대사
인물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금성태수를 역임한 호족.
이칭
문명(文明)
시호
원열(元烈), 민혜(敏惠)
이칭
세조위무대왕(世祖威武大王), 왕용건(王龍建)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897년(효공왕 1)
출생지
미상
주요 관직
금성태수(金城太守)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금성태수를 역임한 호족.
개설

고려 태조의 아버지이다. 초명은 왕용건(王龍建)이며, 자는 문명(文明)이다. 부인은 위숙왕후 한씨(威肅王后韓氏)로 몽부인(夢夫人)이라고도 한다. 용모가 뛰어나고 도량이 넓어서 삼한을 병탄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생애 및 활동사항

877년(헌강왕 3) 동리산문(桐裏山門)의 선승 도선(道詵)의 예언으로 아들을 낳으니 곧 왕건이다. 통일신라의 정치가 쇠퇴하여 견훤(甄萱)과 궁예(弓裔)가 스스로 각각 태봉과 후백제를 세우고 일어섰을 때 송악군(松嶽郡)의 사찬(沙粲)으로 있었는데, 896년(진성여왕 10)에 자신의 군(郡)을 들어 궁예에게 귀부하여 금성태수(金城太守)가 되었다.

이 때 궁예에게 “대왕께서 만일 조선·숙신·변한 땅의 왕이 되고자 하신다면 송악에 성을 쌓고, 먼저 나의 아들 왕건을 성주로 삼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니, 궁예가 그 말을 따라 왕건으로 하여금 발어참성(勃禦塹城)을 쌓게 하고 성주로 임명하였다.

이듬해 금성군(金城郡)에서 죽으니 영안성(永安城) 강변의 석굴에 장사지내고 능호를 창릉(昌陵)이라 하였다. 후일 왕건이 임금이 되자 추존하여 세조위무대왕(世祖威武大王)이라 하였다.

1027년(현종 18)에 시호를 가상(加上)하여 원열(元烈)이라 하였으며, 1253년(고종 40)에 또 가하여 민혜(敏惠)라 하였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