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태조의 아버지이다. 초명은 왕용건(王龍建)이며, 자는 문명(文明)이다. 부인은 위숙왕후 한씨(威肅王后韓氏)로 몽부인(夢夫人)이라고도 한다. 용모가 뛰어나고 도량이 넓어서 삼한을 병탄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877년(헌강왕 3) 동리산문(桐裏山門)의 선승 도선(道詵)의 예언으로 아들을 낳으니 곧 왕건이다. 통일신라의 정치가 쇠퇴하여 견훤(甄萱)과 궁예(弓裔)가 스스로 각각 태봉과 후백제를 세우고 일어섰을 때 송악군(松嶽郡)의 사찬(沙粲)으로 있었는데, 896년(진성여왕 10)에 자신의 군(郡)을 들어 궁예에게 귀부하여 금성태수(金城太守)가 되었다.
이 때 궁예에게 “대왕께서 만일 조선·숙신·변한 땅의 왕이 되고자 하신다면 송악에 성을 쌓고, 먼저 나의 아들 왕건을 성주로 삼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니, 궁예가 그 말을 따라 왕건으로 하여금 발어참성(勃禦塹城)을 쌓게 하고 성주로 임명하였다.
이듬해 금성군(金城郡)에서 죽으니 영안성(永安城) 강변의 석굴에 장사지내고 능호를 창릉(昌陵)이라 하였다. 후일 왕건이 임금이 되자 추존하여 세조위무대왕(世祖威武大王)이라 하였다.
1027년(현종 18)에 시호를 가상(加上)하여 원열(元烈)이라 하였으며, 1253년(고종 40)에 또 가하여 민혜(敏惠)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