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는 원손이나 세손을 제외한 세자의 다른 아들을 위한 별도의 교육제도가 없었다. 봉작(封爵)을 받은 후 종친(宗親)의 일원으로 종학(宗學)에서 수학할 수 있었을 뿐이다. 영조 대 사도세자의 여러 아들이 궁에서 자라게 되자 비로소 이들을 위한 교육제도가 마련되었다.
영조는 1756년(영조 32) 10월에 원손을 제외한 세자의 아들들을 ‘왕손(王孫)’으로 지칭하고 이들의 교육을 위한 왕손교부(王孫敎傅)를 신설하였다. 1명의 왕손교부가 여러 왕손들의 교육을 담당하였으며, 강학기구는 교학청(敎學廳)으로 명명하였다.
이에 따라 왕손들은 왕손교부에게 수업을 받다가 10세가 되어 봉작을 받으면 종학에서 수학하였다. 왕손교부는 궁에서 자라는 왕손의 아동기 교육을 위해 마련한 한시적인 직임이었다.
1757년(영조 33)에 1월에 처음으로 왕손교부를 임명하였는데, 1764년(영조 40), 왕손인 은언군과 은신군이 봉작을 받으면서 그 자리가 없어졌다. 그 동생인 은전군은 1767년(영조 43)에 봉작을 받았는데, 1771년(영조 47)에 가서야 왕손교부를 두었다가 1773년(영조 49) 혼인한 후에 그 자리를 없앴다.
당시 영조는 혼인하지 않은 왕손은 왕손교부에게 수업을 받고, 혼인한 왕손은 종학에서 수학하는 것을 정식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 후로는 왕손의 지위에 있는 인물이 없었기 때문에 왕손교부도 임명되지 않았다.
법제 상의 왕손교부는 필요할 때만 설치하는 권설직(權設職)으로 왕자사부, 내시교관, 동몽교관과 같이 군직(軍職)으로 체아록을 받고 900일을 근무한 후 6품직으로 승진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