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개성(開城). 고려 제19대 명종의 서자이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고려 제19대 명종에게는 서자 10여 명이 있었다고 전한다. 즉, 왕선사(王善思)·왕홍기(王洪機)·왕홍추(王洪樞)·왕홍규(王洪規)·왕홍균(王洪鈞)·왕홍각(王洪覺)·왕홍이(王洪貽) 7명은 그 이름을 확인할 수 있지만, 나머지는 확인할 수 없다. 이들은 모두 첩의 소생이었으므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으며 소군(小君)이라는 칭호가 주어졌다. 하지만 이들은 무신정권이라는 혼란한 시기를 틈타 뇌물을 받고 인사에 간여함으로써 정치기강의 문란을 불러 일으켰다.
1196년(명종 26) 이의민을 제거한 최충헌(崔忠獻)·최충수(崔忠粹) 형제는 ‘봉사십조(封事十條)’를 올려 개혁을 시도하려고 했는데, 이 중 6번째에 승려의 왕궁 출입과 고리대업을 금지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이들 명종의 소군들도 궁중 출입을 금지하여 절로 돌려보내졌고, 그 이듬해 명종이 폐위되면서 동시에 해도(海島)로 유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