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양군(鷹揚軍)과 함께 2군으로서 왕의 친위군(親衛軍)·시위군(侍衛軍)으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2군은 그 형성시기가 모호하여 이를 잘 알 수 없으나, 『고려사』에 의하면 1017년(현종 8)의 기록에 용호군이 처음 보이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설치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현종 때 거란의 침입, 김훈(金訓)·최질(崔質)의 반란 등으로 궁성의 시위군을 강화시키고 조직화할 필요를 느끼게 할 사유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2군은 응양군(鷹揚軍) 1령(領, 1,000명)과 용호군(龍虎軍) 2령으로 구성되었다. 용호군에는 최고 지휘관인 정3품의 상장군(上將軍) 1명, 종3품의 대장군(大將軍) 1명을 두었으며, 각 영에는 정4품의 장군(將軍) 각각 1명, 정5품의 중낭장(中郞將) 각각 2명, 정6품의 낭장(郎將) 각각 5명, 정7품의 별장(別將) 각각 5명, 정8품의 산원(散員) 각각 5명, 정9품의 위(尉) 각각 20명을 두었으며, 또한 대정(隊正)을 각각 40명씩 두었다. 충선왕이 용호를 호분(虎賁)으로 고쳤는데, 그 후 친어군(親禦軍)으로 고쳤고 그 후에 또다시 용호군으로 고쳤다. 한편, 금군의 존재를 주목하여 2군의 성격을 친위군으로 보는데 비판적인 견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