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우영조(禹永祚). 경상북도 청송 출신.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뒤 1906년 5월에 정용기(鄭鏞基)가 영천(永川)에서 산남창의진(山南倡義陣)을 조직, 의병항쟁을 개시하자, 김일언(金一彦)과 함께 진보(眞寶) 지역의 소모(召募) 책임을 맡아 의병을 모집하였다. 그 뒤 의병대장 정용기가 관군에 체포되면서 의진이 해체되자 한동안 잠적하여 있었다.
1907년 8월 정용기가 아버지 정환직(鄭煥直)의 주선으로 석방되어 의진을 재구성할 때 다시 의진에 투신, 신성·청송·자양 등지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여 전과를 올렸다. 같은 해 10월 정용기가 전사하자 정환직을 의병대장에 추대한 뒤 신령·의흥·안동·청송·청하 등지의 크고 작은 전투에 참가,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정환직 역시 같은 해 12월 일본군에 잡혀 순국함으로써 의진이 큰 타격을 받게 되자, 다시 최세한(崔世翰)을 의병대장에 추대하고 서종락(徐鍾洛) 등과 함께 활약하였다.
그 뒤 1908년 2월 서주일(徐周一)의 휘하에 있으면서 이재원(李在元)과 박태래(朴泰來)로부터 군수품을 모집하는 등의 활약을 하다가 일본군에 잡혀 1910년 2월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았다.
1983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