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영조 ()

근대사
인물
대한제국기 때, 정용기의 산남창의진에서 진보 지역에서 소모 활동을 전개한 의병.
이칭
이칭
영조(永祚)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70년(고종 7)
사망 연도
1963년
출생지
경상북도 청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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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대한제국기 때, 정용기의 산남창의진에서 진보 지역에서 소모 활동을 전개한 의병.
개설

일명 우영조(禹永祚). 경상북도 청송 출신.

생애 및 활동사항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뒤 1906년 5월에 정용기(鄭鏞基)가 영천(永川)에서 산남창의진(山南倡義陣)을 조직, 의병항쟁을 개시하자, 김일언(金一彦)과 함께 진보(眞寶) 지역의 소모(召募) 책임을 맡아 의병을 모집하였다. 그 뒤 의병대장 정용기가 관군에 체포되면서 의진이 해체되자 한동안 잠적하여 있었다.

1907년 8월 정용기가 아버지 정환직(鄭煥直)의 주선으로 석방되어 의진을 재구성할 때 다시 의진에 투신, 신성·청송·자양 등지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여 전과를 올렸다. 같은 해 10월 정용기가 전사하자 정환직을 의병대장에 추대한 뒤 신령·의흥·안동·청송·청하 등지의 크고 작은 전투에 참가,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정환직 역시 같은 해 12월 일본군에 잡혀 순국함으로써 의진이 큰 타격을 받게 되자, 다시 최세한(崔世翰)을 의병대장에 추대하고 서종락(徐鍾洛) 등과 함께 활약하였다.

그 뒤 1908년 2월 서주일(徐周一)의 휘하에 있으면서 이재원(李在元)과 박태래(朴泰來)로부터 군수품을 모집하는 등의 활약을 하다가 일본군에 잡혀 1910년 2월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았다.

상훈과 추모

1983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독립유공자공훈록』1(국가보훈처, 1986)
『독립운동사』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산남의진유사』(산남의진유사간행위원회, 1970)
「대구지방재판소판결문(大邱地方裁判所判決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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