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산광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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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북도 운산군 북진읍에 있는 금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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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운산광산은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읍에 있는 금광산이다. 광구가 352㎢에 이르는 우리나라 제1의 금광산이다. 광맥의 너비는 최대 6m 가량이나, 광석의 평균 품위는 100만 분의 8로 우수하지 않다. 광석은 자체 운영인 제련소에서 제련을 했다. 1905년 우리나라 최초로 건설된 500㎾ 용량의 자가용 수력발전소의 전력을 이용하여 제련했다. 1896년 미국인 모스(Morse,J.R.)가 대한제국으로부터 기한 25년으로 운산광산을 특허 받았다. 1939년경 일본인이 경영하게 되었다. 광복 전에는 대유동·광양 등의 금광산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금광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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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읍에 있는 금광산.
내용

1864년 대원군이 집정을 하자 제반 정무의 개혁에 힘썼는데, 그 중에서도 조선 시대가 시작되면서 금제(禁制)로 되어왔던 광업을 허가하여 징세의 목적물로 삼았다. 금은 광업이 허가되자 열국은 우리 나라에 대한 광산 이권획득에 분망하였는데, 그 주대상물은 금 · 은이었다.

대체로 1885년경 영국 · 일본이 진출하였는데, 이보다 10년쯤 늦게 운산광산의 채광이 시작되었다. 1896년 미국인 모스(Morse,J.R.)가 대한제국으로부터 기한 25년으로 운산군 일원의 금광구(金鑛區)를 특허받게 되었다.

모스는 동양합동광업회사를 조직하고 황실(皇室)에 자본주 100에 대한 25주(株)를 주고 일시금 25만원을 헌금하였고, 또한 매년 2만 5000원을 헌상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서도 당시 운산금광이 개발된 지 얼마 안 가서 이익이 얼마나 컸던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1910년 우리 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침해당하자 일본의 광업에 대한 일원화 정책에 따라 다른 외국인 운영의 광산들과 함께 운산광산도 1939년경 일본인이 경영하게 되었다. 광복 전에 운산광산은 대유동(大楡洞) · 광양(光陽) 등의 금광산과 더불어 우리 나라 3대 금광으로 알려졌던 곳이다.

이 중 운산광산은 대유동광산과 어자령(於自嶺)을 중심으로 각각 12㎞ 가량의 거리로 남북으로 대하고 있어서 이 두 개의 광산을 연속되어 있는 것으로 여겼을 정도였다. 운산광산은 구룡강(九龍江) 상류인 대암천(大巖川) 상류에 있는데, 계곡의 서쪽에 있는 호미봉(好尾峰) · 죽암산(竹巖山)과, 동쪽에 솟은 대암산(大巖山) · 삼봉산(三峰山) 등에 매장된 광산이다.

이들 동서 산지 사이를 흐르는 대암천은 사금 채취를 하던 곳이었으며, 조선 초기에 청나라가 금의 요청을 보챘으므로 사금의 채취를 엄히 금하여 이를 뿌리쳤다. 이 광산은 운산군의 북쪽 끝을 이루는 북진읍이 그 중심지이다.

광산은 대암갱(大巖坑) · 교동갱(橋洞坑) · 진후갱(鎭後坑) 등의 주요 채굴갱이 가동되었고, 대암갱 가까이에 제련소가 있었으며, 북진의 시가지 가까이에 광산사무소가 있었다.

광구는 실로 352㎢에 이르는 우리 나라 제1의 금광산이다. 이 중에서 금의 최대 산액을 기록하였던 1935년에는 채굴 광석 가격만 약 432만원으로, 이 중 교동갱이 99만원, 대암갱이 115만원, 진후갱이 62만원, 기타 갱에서 156만원을 차지하였다. 1896년부터 40여 년 동안에 순금 80여을 채굴하였다.

광상은 화강암질암석 중의 심열수성광맥(深熱水性鑛脈)으로서, 자연금에 황동광(黃銅鑛) · 자류철광(磁硫鐵鑛) · 황화철광(黃化鐵鑛) · 섬아연광(閃亞鉛鑛)을 수반한다. 맥석(脈石)은 주로 석영인데 압쇄화강암에 포함되어 있다.

대암갱의 광맥은 대암천계곡의 동쪽에 있는데 대규모의 노암(露岩)을 이루고 지면에 노출되어 있으며, 채굴할 수 있는 광맥의 길이는 660m 이상이나 된다. 교동갱의 광맥은 대암천의 서쪽 산지에 노출되어 있으나, 대암갱의 광맥에 비하여 그 위치가 남쪽으로 약 1,212m 뒤틀어지고 있다. 광맥의 길이는 약 606m이다. 진후갱의 광맥은 교동갱 광맥과 연속된 것이다.

광맥의 너비는 최대 6m 가량이 되나, 광석의 평균 품위는 100만 분의 8로 품위가 우수하지 않다. 다만, 광량(鑛量)이 풍부하고 경영이 좋았기 때문에 대금산으로 개발될 수 있었다.

광석은 자체 운영인 제련소에서 제련을 하였고, 이를 위하여 1905년 우리 나라 최초로 건설된 500㎾용량의 자가용 수력발전소의 전력을 이용하였다. 또, 갱목의 수송을 원활히 하기 위하여 북진의 북쪽에 있는 북선암산(北仙巖山)에 이르는 24㎞에 달하는 운산금광운재궤도(雲山金鑛運材軌道)를 설치하여 북선암산 일대에서 벌채된 갱목을 운반하였다.

참고문헌

『조선광업지』(윤성순, 대한중석광업회사, 1952)
『평안북도지』(평안북도지편찬위원회,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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