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산군 ()

대동여지도 중 평안북도 운산 부분
대동여지도 중 평안북도 운산 부분
인문지리
지명
평안북도 중앙에 위치한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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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평안북도 중앙에 위치한 군.
개관

동쪽은 희천군, 서쪽은 태천군, 서북쪽은 창성군, 남쪽은 영변군, 북쪽은 초산군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5°37′∼ 126°00′, 북위 39°53′∼40°16′에 위치하며, 면적 819.67㎢, 인구 5만 2774명(1944년 현재)이다. 1개 읍 4개 면 50개 동으로 되어 있으며, 군청 소재지는 운산면 읍내동이다.

자연환경

대부분의 지역이 적유령산맥의 남서부를 차지하며, 북쪽에 대암봉(大巖峰, 1,025m)·피난덕산(避難德山, 1,316m)·동림산(東林山, 1,165m)·구봉산(九峰山, 881m), 서남쪽에 백벽산(白碧山, 902m), 중앙에 도리산(道理山, 847m) 등이 솟아 있어 산지가 많은 편이다. 대암봉과 송곡산(松谷山, 1,022m)에서 발원한 온정천(溫井川)이 군의 동북쪽 우현령(牛峴嶺, 536m)에서 발원한 우현강과 합류해 청천강의 지류인 구룡강의 상류를 형성한다.

군내는 산악지대이나 구릉 사이를 흐르는 구룡강과 그 지류인 삼탄천(三灘川) 등에 의해 침식되어 노년기의 지형을 이루므로 그다지 험준하지 않다. 따라서 곳곳에 분지나 침식계곡이 형성되어 주민의 교통로와 거주지·경작지 등으로 이용된다. 온정천의 상류에는 초리지(草里池)가 있다.

기후는 북부에 위치하고 또 내륙지방이어서 교차가 심한 대륙성기후를 나타낸다. 연평균기온 8℃, 1월 평균기온 -11.7℃, 8월 평균기온 24.3℃이며, 연평균강수량 1,323㎜이다. 첫얼음은 10월 중순경에 얼기 시작해 다음해 4월 중순경에 녹는다.

역사

[고 대]

이 군에서는 구석기시대 유물·유적뿐만 아니라 신석기·청동기·철기시대의 유물·유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인접한 정주군에서 신석기시대의 유물·유적이, 정주군·영변군·박천군에서 청동기시대 유물·유적이 발견되고 있으므로 적어도 신석기시대부터는 이 곳에서도 사람이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

고조선시대에 연(燕)나라의 소왕연간(昭王年間, 서기전 312∼279)에 진개(秦開)가 동방을 침공해 세력이 요동의 만번한(滿潘汗)까지 미침에 따라 연나라의 화폐인 명도전(明刀錢)이 창성군·영변군·박천군 등 지금의 평안북도 각지에서 발견되고 있으므로 이 곳에도 연나라의 상인이 내왕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56년(태조왕 4) 고구려가 살수(薩水 : 지금의 청천강)까지 진출함에 따라 이 곳은 고구려 영토로 편입되었으나 군현이 설치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다. 612년(영양왕 23) 수(隋)나라 양제(煬帝)의 침공 때는 이 곳이 평양으로 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많은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현재의 북진읍 동림산 남쪽에 고구려의 명장 연개소문(淵蓋蘇文)의 무덤이 있다고 전하여진다.

[고 려]

이 곳이 고려의 영토로 편입된 것은 광종 때 북진정책을 써서 이 곳 위화진(威化鎭)에 성을 축조하면서부터이다. 이 군은 고려 초에 운중군(雲中郡) 혹은 고원화진(古遠化鎭)이라 했고, 968년(광종 19)위화진으로 개칭하였다. 995년(성종 14)운주(雲州)로 고쳐 방어사를 두고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1231년(고종 18) 이 곳 주민들이 몽고병란을 피해 해도(海島)에 들어갔다가 1261년(원종 2) 육지로 나와 잠시 가산서촌(嘉山西村)에 머무르고 있다가 연산부(延山府)에 예속되었고, 1371년(공민왕 20) 다시 독립하였다.

[조 선]

1413년(태종 13)운산군(雲山郡)으로 고치고 이 군에 속했던 고읍(古邑)이 다른 땅에 깊숙이 들어가 있다[犬牙相入]고 해 정주에 합쳤다. 이 때문에 이 군은 70여 호밖에 되지 않는 쇠잔한 군이 되어 독립된 군으로 유지하기 어려워 1449년(세종 31)정주에 편입되었던 지역을 운산군에 합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당시 호구는 225호, 2,763인이었다. 1456년(세조 2) 운산군에 속했던 고운산(古雲山)을 정주에 예속시키고, 운산군과 가까운 영변의 연산(延山)을 이 군에 합하였다. 1459년 이 군은 궁벽한 산곡에 위치하고 100여호 밖에 되지 않아 공부(貢賦)와 차역(差役)을 견디기 어렵다 해 혁파되어 영변에 예속시켰으나, 3년 뒤에 다시 독립시켰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관원으로 군수·훈도 각 1인이 있었고, 군사체제는 희천·박천과 함께 영변진관에 속해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를 운산군수가 겸임하였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1759년(영조 35) 7면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호구는 1,731호, 7,699인이었다.

『운산읍지』에 의하면, 1895년 행정조직은 동면(東面)·남면(南面)·읍내면(邑內面)·성동면(城洞面)·신면(新面)·고연주면(古延州面)·위곡면(委曲面)·북면(北面)·고운산면(古雲山面) 등 9면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호구는 2,340호, 1만 6002인이었다.

조선시대의 인물로 선비 변경일(邊敬一)은 정묘호란 때 출전해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해 정려문이 세워졌고, 이시항(李時恒)은 1699년(숙종 25) 과거에 급제해 병조정랑·성균관직강·덕산군수 등을 역임했으며, 이 밖에 이소번(李昭蕃) 등 15인의 문과 등과자를 배출하였다.

[근 대]

1895년 지방관제를 개혁해 부군제를 실시할 때 운산군으로 개편되어 의주부에 속하였다. 1896년 전국을 13도로 개편할 때 평안북도 운산군이 되었다. 1895년 7월 미국인 모스(Morse, J. R.)가 조선정부와 금광채광특허협약을 체결, 이듬해 4월 조선정부와 합동으로 동양합동광업회사(東洋合同鑛業會社)를 창립했는데, 일제강점기에 일본광업주식회사로 넘어갔다.

1907년 5월 운산군은 9개 면으로 이루어졌으며, 호구는 4,907호, 2만 282명이었다. 1934년은 5면으로서 9,014호, 4만 8194명, 1943년은 1만 52호, 5만 6090명이었다. 3·1운동 때에는 이 군에서도 운산면·북진면을 주축으로 천도교·기독교가 주동이 되어 만세시위를 벌였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의하면, 집회횟수 7회, 집회인 7,600명, 사망자 40명, 부상자 120명, 투옥자 42명이었다. 3·1운동 후 상해임시정부의 연통제(聯通制) 조직에 있어서는 군감으로 최창렬(崔昌烈)이 임명되었다.

이 군은 내륙에 위치해 무장독립운동이 압록강에 면한 지역보다는 적었지만, 조선총독부 경무국 고등경찰관계연표에 의하면, 1921년부터 1926년까지 북진경찰서의 일본인 경찰을 사살한 것을 비롯해 13회에 걸친 무장독립단의 활동이 기록되어 있다. 독립운동가로는 성면 출신 최명도(崔明道)·백남준(白南俊) 등이 있다.

유물·유적

창성군과의 경계에 있는 어자령(於自嶺)을 넘어서 희천군으로 이어지는 천리장성의 일부가 이 군의 북쪽을 지나가고 있는데, 높이 2.72m, 너비 7.2m, 길이 약 32㎞에 달하는 성곽이 있다. 위연면 상원동 고장마을 주위에 길이 약 2.2㎞, 너비 5.5m의 원형 성인 고장장성(古場長城)이 있는데, 고연주성(古延州城)이라고도 한다. 이 성곽은 천리장성의 일부이며 대부분이 석성이 아닌 작은 돌과 흙으로 쌓은 토성이다.

이 밖에 북진읍 어자동의 토성, 성면 고성하동의 토성, 운산면 용연동의 백벽산성(白碧山城) 등이 있다. 백벽산성은 고려 공민왕 때 축성한 산성으로, 성내에는 용담(龍潭)과 견성암(見性庵)이라는 암자가 있다.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가 이 암자에 잠시 거처했다 하며, 암자 뒤편에는 바위에 새겨진 7구의 불상이 있다. 또 운산면 화옹동에 거대한 고인돌이 있고, 동신면 용호동에 속칭 위만고분군(衛滿古墳群)이라 하는 3기의 고분이 있다. 이들은 고구려 고분으로서 ‘말무덤’·‘황제무덤’·‘궁녀무덤’이라 하며 주위 약 1,280㎡에 흩어져 있다.

말무덤은 기단길이가 동서 약 30m, 남북 20m인 고구려 적석총이고, 황제무덤은 동서 약 28m, 남북 약 26m인 토총이며, 궁녀무덤은 기단이 20.7m, 봉분높이가 4∼5m에 이른다. 동신면 성지동에 ‘되무덤[胡塚]’이 있으며, 위연면 엄상동에 60기, 북진읍 삼산동에 13기 등 ‘당장(唐葬)’이라 불리는 석곽고분이 흩어져 있다.

교육·문화

우리 나라 최대의 금광지대로 일찍부터 외국인들이 몰려들어 다른 지역보다 빨리 서양문물이 도입되었다. 신교육기관이 설립되기 이전에는 향교와 서당에서 유학교육이 실시되었다. 1915년 당시 서당의 수는 58개소로, 서당은 신교육이 실시된 뒤인 1930년대까지도 존립하였다.

신교육기관으로 1909년경부터 유지들에 의해 사립학교가 세워지기 시작해 삼달(三達)·벽산(碧山)·운룡(雲龍) 등 11개교가 있었다. 특히 미국북감리교 계통의 연명학교(延明學校)는 널리 이름나 있었다. 이 밖에 미국인이나 중국인 계통의 학교도 건립되었다. 1910년 이래 공립학교가 건립되기 시작하면서 이 곳에도 1911년 유림학원(儒林學院) 자리에 운산공립보통학교가 세워진 것을 시초로, 1934년까지 북진·온정·성면(城面)·운동(雲東)·광동(光東) 등의 보통학교가 설립되었으며, 광동학교에는 부설로 유치원이 있었다. 한편 외국인의 잦은 내왕으로 서양문물이 도입되기 시작했는데, 1896년 미국인에 의해 종합병원인 운산광산병원이 설립되었으며, 1935년 북진의약회사가 설립되어 양약과 한약을 판매하였다.

문화단체로는 1925년 북진청년회가 조직되어 계몽사업·체육활동 등을 추진하였다. 종교상황을 보면, 불교가 일반적으로 서북지방에서 교세를 떨치지 못한 것을 그대로 반영하듯이, 1935년 당시 운산면 용연동에 견성암과 원적사(圓寂寺), 북진면에 서림사(西林寺)가 있었던 반면, 일찍부터 기독교가 전파되어 1902년 읍내에 운산교회가 건립되고 이어서 북진교회가 건립되었다.

대표적인 민요로는 〈왁새요〉·〈나무타령〉·〈꼬리따기요〉·〈자루배타령〉 등이 전한다. 이 중 〈왁새요〉와 〈나무타령〉은 다음과 같다. “왁새야 독새야/너오마니 소꽃 밑에/불붙는다/네복주깨 내복주깨/쭉쭉 끼처라.”, “오다가다 오동나무/가다오다 가죽나무/십리절반 오리나무/소가간다 소나무/개가간다 개살구나무/거짓없다 참나무/칼로찔러 피나무/발발떠는 사시나무/배아프다 배나무/배고프다 시닥나무/젖먹어라 전나무/살이찐다 살구나무/떡먹어라 떡갈나무/캄캄하다 밤나무/방귀뀐다 뽕나무/무서워라 옻나무.”

산업·교통

농업은 경작지의 75%를 밭이 차지하는 만큼 조·옥수수·콩·수수·목화·대마 등의 밭작물이 많이 산출된다. 부업으로 축우·양잠 등도 행하여진다. 이 군의 주요 산업은 광업으로, 금을 비롯해 은·흑연·운모 등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다. 광맥을 보면 편마암·화강암 속의 함금석영맥(含金石英脈)에 여러 광물이 부존(賦存)한다. 광구(鑛區)의 면적이 352㎢에 달해 마치 군 전체가 광구같이 보인다.

특히 금광이 많아 우리 나라 제일의 산금지대로 알려져 있다. 1895년 조선정부와 금광채광특허 협약을 체결한 미국인 모스(Morse, J. R.)는 1896년부터 25년 동안 특허를 얻어 동양합동광업회사를 설립해 1939년까지 채광했으며, 그 뒤에 일본인에게로 채굴권이 넘어갔다. 1932년에는 145만 4348g의 금을 채굴했는데, 당시의 돈으로 370만 8587원에 달하는 양이었다.

시장으로는 『임원경제지』에 의하면, 1830년대에 운산군에는 5·10일의 관전장(館前場)만이 있었다. 여기에서 거래된 주요 품목은 쌀·콩·조·옥수수·깨·포목·솜·조기·대추·밤·배·감·옹기·놋그릇·꿀·소·돼지 등이었다. 또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1902년경 고연주장(古延州場)이 있었는데, 4·9일의 5일장이었다.

이 군에는 가장 큰 금광이 있는 북진읍에 광부나 외국인들이 몰려오면서 북진장이 번성했는데, 이는 북진읍 진동에서 2·7일에 열리는 장으로 군내에서 가장 유명하였다. 이 밖에 운산면 운산장이 5·10일에, 위연면 고장이 3·8일에, 동신면 이동장이 4·9일에, 성면 성창장이 1·6일에 열렸다.

교통은 광산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 중요한 도로는 모두 큰 광산으로 통하며, 또한 모두 운산을 중심으로 해 뻗어 있다. 운산∼박천간, 운산-우현령-초산간, 운산∼청산장간, 운산∼태천간, 북진∼대유동간에 광산도로가 발달되어 교통은 비교적 편리한 편이다.

읍·면

[북진읍北鎭邑]

군의 서북부에 위치한 읍. 면적 160.98㎢, 인구 1만 8626명(1944년 현재). 읍 소재지는 진동이다. 북쪽에는 피난덕산을 비롯해 계파령(溪波嶺, 830m)·대암봉·호미봉(好尾峰, 1,143m) 등의 높은 산이 병풍같이 둘러싸고 있고, 남쪽에는 도리산이 있다. 하천으로는 구룡강으로 유입하는 온정천이 중앙부를 흐른다.

주요 산업은 농업으로 총인구의 55%가 농사에 종사하며, 그 중 85% 이상이 밭농사에 종사한다. 주요 농산물로는 벼·조·콩·옥수수·피·수수·메밀·보리 등이 경작된다. 이 밖에 특용작물로 대마·참깨·들깨·아주까리 등이 재배되며, 고구마·감자도 많이 수확된다.

일찍이 농가의 부업으로 양잠업이 발달했고, 소를 비롯해 목축도 행하여진다. 또한 이 곳은 무엇보다도 금광업으로 이름난 지역으로 광부나 외국인들이 많이 몰려들며, 장날에는 이웃 군민들까지도 찾아오는 경제중심지를 이룬다.

교통은 군의 간선도로가 읍의 중앙을 통과해 대유동 방면으로 이어지며, 북쪽의 초산군으로도 도로가 연결된다. 진(鎭)·대암(大巖)·교(橋)·삼산(三山)·초리(草里)·월양(月陽)·흥대(興臺)·어자(於自)·월은(月隱) 등 9개 동이 있다.

[동신면東新面]

군의 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103.38㎢, 인구 6,331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이동이다. 서북쪽에 도리산, 남쪽에 옥녀봉(玉女峰, 225m)이 솟아 있고, 동쪽에는 구룡강의 지류가 남으로 흐르면서 주변을 개석(開析)하고 있다.

주 산업은 농업으로 밭농사 중심이나 벼농사도 활발하다. 주요 농산물로는 벼·조·콩·수수·옥수수·피·감자·메밀 등이 재배된다. 농가부업으로 양잠과 가축사육이 활발하며, 이 밖에 목탄도 제조된다. 이동의 구리개(九里介)에 있는 주물공장에서는 솥·보습 등이 주조되어 군내의 각지로 공급되며, 이웃한 군에까지도 반출된다.

이동장은 농산물과 직물의 거래로 알려져 있다. 교통은 군의 간선도로가 중앙을 지난다. 고적으로는 용호동에 3기의 고분이 있는데, 1호분은 궁녀무덤, 2호분은 위만(衛滿)의 황제무덤, 3호분은 말무덤이라 전하여진다. 이(利)·성지(聖旨)·용호(龍湖)·마장(馬場)·이답(泥踏)·가(加)·좌(佐) 등 7개 동이 있다.

[성 면城面]

군의 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183.28㎢, 인구 6,982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초하동이다. 동쪽에 도리산, 서쪽에 지경령(地境嶺, 165m), 남쪽에 백벽산 등이 면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으나 모두 낮은 구릉성 산지들이다.

면내 용봉(龍峰)에서 발원한 삼탄천은 구룡강의 지류로, 곳곳에 침식분지를 형성해 주민의 주거지와 경작지로 이용된다. 농업을 주로 하며, 특히 밭농사가 중심을 이룬다. 예로부터 수리조합시설이 잘 갖추어져 벼농사도 행해지나 조·콩·옥수수·수수·피·메밀 등이 주된 농작물을 이룬다. 이밖에 목화·감자 등이 재배된다.

농가부업으로 가축사육과 양잠 등이 활발히 이루어지며, 특히 황소는 널리 알려져 있다. 임산업으로 광산용 갱목과 목탄용 잡목 등이 벌채된다. 초하동의 성창장에서는 산채와 약초가 많이 거래된다.

교통은 운산에서 초하동을 지나 창성군 청산으로 가는 광산도로가 중앙을 통과한다. 초하(草下)·고성상(古城上)·고성하(古城下)·남산상(南山上)·남산하(南山下)·응봉(鷹峰)·초상(草上)·연봉상(延峰上)·연봉하(延峰下) 등 9개 동이 있다.

[운산면雲山面]

군의 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136.82㎢, 인구 9,273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읍내동이다. 적유령산맥이 끝나는 남쪽 사면 기슭에 위치해 지세는 그다지 험하지 않다. 동쪽에 옥녀봉, 서쪽에 마두산(馬頭山, 519m), 남쪽에 오봉산(五峰山, 593m), 북쪽에 백벽산 등이 있다.

하천으로는 구룡강에 유입하는 삼탄천과 남면천이 흐른다. 주 산업은 농업으로 밭농사 중심이며, 주요 농산물로는 조·콩·옥수수·수수·피·메밀 등이 생산된다. 그런데 조양동 일대는 ‘군론니벌’이라 해 예로부터 벼농사로 이름나 있으며 가축의 사육도 활발하다.

농가부업으로 양잠과 약초재배가 활발하지만 운산을 중심으로 한 금광업이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교통은 박천군 맹중리를 기점으로 해 북진읍에 이르는 군의 간선도로를 비롯해, 초산-청산장-태천 등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사방으로 뻗어 있어 편리하다.

명승지로는 백벽산에 백벽산성이 있고 산꼭대기에는 우물이 있다. 또 백벽산의 서쪽 기슭에 용연(龍淵)이라는 못이 있는데, 여기서 용이 승천했다고 해 붙여진 이름으로 마을이름도 용연동이다.

용연동에서 태천으로 넘어가는 고갯길 옆에는 용연약수가 있는데, 속병과 피부병에 좋다 해 찾는 사람이 많다. 읍내(邑內)·송현(松峴)·화옹(化翁)·조양(朝陽)·입석상(立石上)·입석하(立石下)·제인상(諸仁上)·제인하(諸仁下)·계림(桂林)·용흥(龍興)·용포(龍浦)·용연(龍淵) 등 12개 동이 있다.

[위연면委延面]

군의 동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235.02㎢, 인구 1만 1512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답하동이다. 동북쪽이 높고 서남쪽으로 갈수록 낮아지는 지형을 이룬다. 동림산·우현령 등이 면을 둘러싸고 있으며, 우현령에서 발원한 우현천이 구룡강으로 유입된다.

또한 면의 서북부에서 구룡강의 본류가 동남류하는데, 그 일대가 주민의 생활중심지를 이룬다. 주 산업은 농업으로 벼농사도 행해지나 밭농사의 비중이 크다. 농산물로는 쌀을 비롯해 조·콩·수수·옥수수·피·메밀 등이 경작된다. 약초와 산채의 집산지로 알려져 있으며, 상원동의 고시장(古市場)에서는 농산물과 가축이 거래된다.

교통은 운산에서 우현령을 지나 초산으로 통하는 국도가 면의 동부를 남북으로 지나며, 또한 군의 간선도로가 서부를 지나 편리하다. 명승지로는 온정온천(溫井溫泉)이 있는데, 심장병·피부병·위장병·신경질환 등에 특효가 있다 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또한 온천 주변은 우현천의 잔잔한 물결과 이에 비친 소나무와 기암괴석으로 경치가 아름다워 온정금강(溫井金剛)이라 불린다.

고적으로는 상원동에 고려 때 축조한 천리장성의 일부인 고장장성의 터가 남아 있다. 답하(畓下)·용두(龍頭)·상원(上院)·답상(畓上)·우하(牛下)·우중(牛中)·우간(牛間)·우상(牛上)·풍하(豐下)·풍중(豐中)·엄상(嚴上)·풍상(豐上)·엄하(嚴下) 등 13개 동이 있다.

광복 후 변천

평안북도 동부에 있는 군. 동쪽은 향산군과 자강도 희천시, 서쪽은 동창군·태천군, 남쪽은 구장군·영변군, 북쪽은 자강도 송원군과 접해 있다. 동경 125°37′∼ 126°00′, 북위 39°54′∼ 40°17′에 위치하며, 인구는 10만 1천여명(1996년 추정)이다.

1952년 12월 행정구역 개편시 운산군과 북진군으로 분할되었다가 1954년 10월 다시 통합해 운산군이 되었다. 1956년 9월 북진리를 폐지해 그 중 일부는 금산노동자구와 북진노동자구로 개칭되었다.

행정구역은 운산읍과 북진(北鎭)노동자구, 부흥(富興)·도청(道靑)·삼산(三山)·방어(防禦)·풍량(豊兩)·영웅(英雄)·상원(上院)·봉지(鳳至)·마상(馬尙)·좌(佐)·마장(馬場)·성봉(成峰)·연하(延下)·응봉(鷹峰)·남산(南山)·조양(朝陽)·구읍(舊邑)·용흥(龍興)·전승(戰勝)·고성(古城)·용호(龍湖)·월양(月陽)·제인(諸仁)·화옹(化翁)·이답(泥踏)·평화(平和)·답상(畓上)·운봉·조산·구두·상서·하서·임석 등 33개 이로 되어 있다. 군 소재지는 운산읍이다.

자연환경

이 군은 대부분의 지역이 구룡강과 그 지류들에 의해 이루어진 골짜기들과 크고작은 분지들로 되어 있다. 군의 북부에는 1,000m 안팎의 산들로 이루어진 피난덕산맥이 북서-남동방향으로 뻗어 있다.

연평균기온은 8.2℃, 1월 평균기온은 -10.2℃, 8월 평균기온은 23.8℃이며, 연평균강수량은 1,400㎜이다. 첫서리는 10월 6일경, 마감서리는 4월 20일경에 내린다. 산림은 군면적의 73%를 차지하며, 소나무와 참나무가 주요 수종을 이루고 있다. 또 금·인회석·흑연 등의 지하자원이 매장되어 있다.

산업·교통

이 군의 주요 산업은 농업과 공업으로, 농업은 경지면적의 70%가 밭이며, 주요 농산물로는 벼·옥수수·콩 등이 생산된다. 그러나 이 군은 무엇보다 최대의 금산지로 알려져 있다. 축산업이 성하며, 특히 소는 도내에서 가장 많이 기른다.

공업은 중앙공업공장·기업소·지방산업공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운산광산은 재개발을 추진하기 위해 1986년 8월 프랑스 정부지질광산 조사국과 일본 통산성의 전문사에 의뢰한 결과 고품위 광산으로 평가받았으며 추정량은 1,000 톤으로 추정되었다.

북한상사와 합병방식으로 같은 해 9월에 조총련 상공인 30명이 자본금 1억2000만 엔 규모의 광산개발회사 ‘운산금광개발’을 설립하고, 수몰할 갱도복구작업 3년 후에 연간 2만 톤, 장기적으로 연간 10만 톤생산을 목표로 1차개발자금 100∼200억 엔과 함께 8년간 500억 엔 규모의 투자를 계획했으나 시작한 지 2년도 못 되어 부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이 군은 평안북도 내의 내륙지대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교통망으로는 만포선의 북신현역(신설된 향산군)에서 운산을 거쳐 북진에 이르는 철도가 군의 북부를 통과하고 있으며, 창성∼향산간, 박천∼초산간 등의 도로가 있다.

운산군 동림산 아래의 운산온천은 부인병·신경성질환·관절염·장염 등에 효험이 있는데, 1960년대 이후 여성전용 온천휴양지로 지정해 부인병을 치료하고 있다. 온천병원에서는 물리치료·사우나치료·감탕치료와 한방식 광천(鑛泉)물리치료를 하고 있다.

유적으로는 용호리구봉산에 고분(古墳)이 있고, 운산읍에서 서쪽으로 8㎞ 지점에 있는 백벽산에는 고려 공민왕 때 축조한 석성의 터가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고려사절요』
『신증동국여지승람』
『朝鮮の市場』(조선총독부, 1937)
『평안북도지』(평안북도지편찬위원회, 1973)
『운산군지』(운산군지편찬위원회, 1978)
『북한문화재실태와 현황』(문화공보부문화재관리국, 1985)
『인물의 고향』-북한편(중앙일보사, 1991)
『북한지지요람』(통일원, 1993)
『북한의 산업』(대한무역진흥공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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