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자정(子靜). 원몽린(元夢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목사 원명구(元命龜)이다. 아버지는 예조판서 원경하(元景夏)이며, 어머니는 예조판서 신사철(申思喆)의 딸이다.
1750년(영조 26) 진사시에 합격하고, 1752년(영조 28)에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세마(洗馬)가 되었다. 1753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가 되고, 정언(正言)·사서(司書) 등을 역임하였다. 홍문관부응교(弘文館副應敎) 재임시 『천의소감(闡義昭鑑)』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이조참판·이조판서 등을 거쳐 1772년에 우의정에 이르렀다. 아버지의 대탕평(大蕩平)의 뜻을 받아 편당에 기울어지지 않아, 영조의 총애를 받았다. 성격이 공평하고 정직하여 전주(銓注)나 고시(考試)를 공정하게 하였으며, 세자시강원찬선(世子贊善) 송명흠(宋明欽)이 억울하게 관직이 추삭됨을 보고 임금에게 직간하여 송명흠을 복구시켰다.
사장(詞章)에 능하여 1765년 이조참판으로 재직시, 서명응(徐命膺)과 함께 『어제독서록(御製讀書錄)』과 『연대고(年代考)』를 왕명으로 교정하였다. 1769년(영조 45) 역시 왕명으로 울릉도의 지세와 물산을 그리고 조사하여 바쳤다. 시호는 문민(文敏)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