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종종무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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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단체
1908년 거국적인 교단 결성을 위하여 설립된 불교교단 통솔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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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08년 거국적인 교단 결성을 위하여 설립된 불교교단 통솔기구.
설립목적

1907년 이회광(李晦光)을 회장으로 한 불교연구회(佛敎硏究會)가 일본 정토종적(淨土宗的)인 색채에서 탈피, 거국적인 교단을 형성하고자 하는 여망에 따라 세우게 된 것이다.

내용

불교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종래의 11종을 7종으로 축소하고, 다시 선종과 교종의 두 종파로 강제 폐합된 이래 중종 및 명종 때에는 두 종파의 이름마저 없어진 채 줄곧 무종무파(無宗無派)의 산중불교로 일관되어 왔다.

그러다가 1895년(고종 32) 4월 승려의 입성금지령(入城禁止令)이 해제되어, 산속에만 숨어 살던 승려들도 자유로이 도성 안으로 출입하여 홍교(弘敎)의 활동을 할 수 있는 계기를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동대문 밖에 원흥사(元興寺)를 세우고 국내의 수사찰(首寺刹)로 삼아서 전국 사찰의 사무를 총관장하였으며, 1902년에는 조정에서 궁내부(宮內部) 소속으로 관리서(管理署)를 설치하여 전국의 사찰을 국가에서 관리하였다.

이 때 관리서에서는 원흥사를 대법산(大法山)으로 삼고 각 지방의 16개의 대표사찰을 중법산(中法山)으로 삼아 모든 절들을 관리하였으나, 1904년 1월에 관리서 제도가 폐지되었다. 이에 따라 업무는 내부관방(內部官房)으로 옮겨졌다가 곧 내부지방국(內部地方局)에서 주관하게 되었다.

관리서가 폐지된 뒤 승려들은 근대 불교의 발상지라 할 수 있는 원흥사를 중심으로 하여 새로운 교단 운영의 움직임을 보이다가, 1908년 승려대표자 52인이 3월 6일 원흥사에 모여 원종을 결성하였다. 이들이 원종이라는 이름을 채택한 까닭은 세 가지 설로 요약된다.

첫째는 전국 여러 사찰의 대표승려들이 회의를 통해서 함께 세웠으므로 그 원융무애(圓融無碍)의 뜻을 취하였기 때문이라는 설, 둘째는 영명사(永明寺)연수(延壽)의 ≪종경록 宗鏡錄≫에서 따온 것으로 선교겸수(禪敎兼修)의 종문(宗門)을 표방한 것이라는 설, 셋째는 당시의 불교가 참선과 간경(看經)과 염불, 더 나아가서는 밀교까지 원수(圓修)한다는 뜻에서 원종이라 하였다는 것 등이다.

그리고 이 원종이 갖는 더 큰 의의는 조선시대 500년의 억불정책에서 자유를 얻은 불교교단이 새로운 시대적 요청에 의해서 새로운 종명(宗明)을 밝힌 최초의 명칭이라는 데 있다.

이 원종종무원은 이회광(李晦光)을 대종정(大宗正)으로 추대하고 총무에 김현암(金玄庵), 교무부장에 진응(震應), 학무부장에 보륜(寶輪)과 지순(之淳), 서무부장에 석옹(石翁)과 대련(大蓮), 인사부장에 회명(晦明)과 구하(九河), 감찰부장에 보봉(普峰)과 청호(晴湖), 재무부장에 학암(鶴庵)과 용곡(龍谷), 고등강사에 박한영(朴漢永)을 인선하였다. 그리고 1910년에 각황사(覺皇寺)를 서울 전동에 창건하고 조선불교중앙회무소 겸 중앙포교소로 삼았다.

그러나 국권상실 직후 대종정 이회광은 일본 조동종(曹洞宗)의 관장을 만나 원종과 일본 조동종과의 연합에 합의를 보고 10월 6일에 연합조약 7개 조를 체결하였다.

그 조약에는 일본 조동종이 우리 나라 포교를 위하여 협력하겠다는 내용과, 조동종 승려들을 우리 나라 사찰에 파견하여 청년승려의 교육을 맡도록 하는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를 알게 된 승려들은 조선불교를 일본 조동종으로 개종시키려는 음모이며 우리 불교를 일본에 팔아먹으려는 소행이라고 분개하였고, 이 문제로 1910년 음력 10월 5일에 광주증심사(證心寺)에서 승려대회를 열었다. 이어 한용운(韓龍雲)·오성월(吳惺月) 등이 전국 사찰을 다니면서 연설하고 격문을 돌려 운동을 크게 일으켰다.

그리하여 1911년 정월 15일에 영남과 호남의 승려들이 순천 송광사에서 총회를 열고 임제종(臨濟宗)을 세우게 됨에 따라 원종은 서울을 중심으로 한, 일부 지역에만 그 영향력을 끼쳤다. 그러나 임제종과 원종은 1911년 6월에 총독부에서 <사찰령>을 반포함에 따라 없어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조선불교통사』(이능화, 신문관, 1918)
『한국불교사개설』(김영태, 경서원, 1986)
집필자
이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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