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국미(國美), 호는 삼족당(三足堂) 또는 석병(石屛). 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 위동식(魏東寔)이며, 어머니는 영광김씨(靈光金氏) 김진(金振)의 딸이다.
위세보는 시로써 명성을 떨쳤고, 또한 글씨와 그림에도 깊은 조예가 있었다. 위세보의 나이 17세에 읍쉬(邑倅: 고을의 장관)가 위세보의 명성을 듣고 초청하여 시와 글씨를 시험하고 또 매죽(梅竹)을 그려보게 하고는 서울에 명류(名流)들이 많지만 이처럼 준아(俊雅)하고 청광(淸曠)한 풍격(風格)은 없다고 극구 칭찬하였다.
위세보의 32종형인 위세직(魏世稷)이 서화를 좋아하고 풍격(風格)도 알았다. 위세직이 일찍이 송일중(宋日中)의 초서(草書) 8첩을 얻어 위세보에게 주었는데 위세보가 2첩을 빼고 같은 종이에 모사(模寫)하여 보여주어도 위세직은 분별하지 못한 적이 있었다.
또한 선도중(宣道重)이 위세보에게 포도그림을 요청함으로 그려주었는데, 그 그림을 벽에 붙여 놓자 선도중의 어린 아들이 저 포도를 달라고 졸라댄 일도 있었다고 한다. 저서로는 『삼족당유고(三足堂遺稿)』 1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