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경수 ()

정치·법제
인물
일제강점기 춘황투쟁(春荒鬪爭) 당시의 군인.
이칭
이칭
유삼손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15년
사망 연도
1958년 11월 9일
출생지
함경남도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목차
정의
일제강점기 춘황투쟁(春荒鬪爭) 당시의 군인.
생애 및 활동사항

1915년 함경남도 빈농가정에서 태어나 소학교를 졸업했다. 1932년 중국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하여 태평구(太平溝) 돌문안지부 책임비서가 되었고, 같은 해 8월 길림성 연길현(延吉縣) 항일유격대에 입대하여 기관총 사수가 되었다. 1933년 봄부터 이듬해까지 두 차례 민생단원 혐의를 받고 고초를 당하였다.

1934년 6월 다시 항일무장투쟁에 참가하였고, 1936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공산당원이 되었다. 1937년 무산지구 국내진공작전, 간삼봉(間三奉)전투 등에 참가하였다. 1938년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제1로군 제1영 제1련 제1배장으로 김일성의 지휘 아래 빨치산 활동을 하였다. 1940년 소련 하바로프스크 지역으로 월경(越境)하였다.

1942년 동북항일연군 교도려(敎導旅, 소련 붉은군대 제88특별저격여단)에서 소련군의 정찰대원으로 활동하였다. 광복 후 38선 이북으로 귀환하자마자 공산당조직을 만들기 위해 지방으로 파견되었다. 1948년 2월 조선인민군 창군 당시 제2보병사단의 연대장이 되었다.

1949년 2월 조선인민군 창군 1주년을 맞이하여 국기훈장(國旗勳章) 2급을 수여받는 등 인민군 창군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1949년 5월 민족보위성 직할 제105 전차여단장을 맡아 인민군의 탱크부대를 총괄하였다.

1950년 8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웅칭호를 받았다.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사단장을 맡았다. 1951년 1월 제3군단장을 역임하였다. 1955년 7월 네덜란드를 방문 네덜란드 해방 기념식에 참석하였다.

1956년 4월 노동당 제3차 대회에서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1957년 2월 인민군 제2집단군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8월 최고인민회의 제2기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1958년 11월 제1집단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11월 9일 병사하였다.

참고문헌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화전춘수(和田春樹) 저·이종석 역, 창작과비평사, 1992)
『조선노동당 연구』(이종석, 역사비평사, 1995)
『조선전쟁』(와다 하루끼 저·서동만 역, 창작과비평사, 1999)
「北朝鮮における社會主義體制の成立」(徐東晩, 東京大學校博士學位論文, 1995)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