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함경북도 길주에서 태어났다. 1930년대 초반 함경북도 길주군의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에 참여하였다. 1936년, 1937년에 있었던 조국광복회 국내와 장백현 일원의 항일무장투쟁 지원그룹 조직이 붕괴되는 ‘혜산사건(惠山事件)’을 계기로 검거되어 옥중에서 해방을 맞았다. 이 사건 주모자로 1941년 처형된 이제순(李悌淳)이 친동생이다.
1946년 북조선노동당 길주군당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47년 북조선노동당 함북도당 위원장을 맡았다. 1948년 3월 노동당 제2차 대회에서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함경북도 인민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50년 노동당 자강도당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54년 노동당 검열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55년 4월 체코슬로바키아 해방 1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였고, 같은 해 8월 제2차 내각의 국가겸열상(國家檢閱相)에 임명되었다.
1956년 2월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에 북한 대표로 참석하였다. 같은 해 4월 노동당 제3차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 겸 조직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57년 8월 최고인민회의 제2기 대의원, 대의원 자격심사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58년 9월 국기훈장 제1급을 수여받았다. 1959년 2월 조선직업총동맹 위원장을 맡았고, 이듬해 노동당 평양시당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61년 5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겸 상임위원, 같은 해 9월 노동당 제4차대회에서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정치위원, 당중앙위원회 연락국장에 선출되었다. 1962년 10월 최고인민회의 제3기 대의원 및 상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66년 10월 제2차 당대표자회에서 정치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출되고, 노동당 비서국 대남 담당 비서에 임명되었다.
1967년 3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 15차 전원회의에서 박금철(朴金喆)·허석선(許錫宣) 등과 함께 대남 공작에 실패하고 김일성사상과 당 노선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숙청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