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중무(仲武). 연안 유씨(延安劉氏)의 시조이다. 어머니는 재상 홍섬(洪暹)의 노비였다.
어려서부터 고학을 해 무과에 급제하였다. 당시의 신분 제도에서는 과거에 응시할 수 없는 노비 출신이었으나, 홍섬의 깊은 배려로 노비 신분을 면제받았다. 여러 무관직을 거친 뒤 1591년(선조 24) 전라좌수사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신립(申砬)의 조방장(助防將)이 되어 전임하였다.
죽령(竹嶺)을 방어하다가 패배하자, 군사를 영솔해 방어사 신할(申硈)의 밑에 들어가 그 부장이 되었다. 대장 신할과, 마침 1,000명의 군졸을 이끌고 그 곳에 달려온 도순찰사 한응인(韓應寅) 등과 함께 임진강을 방어하였다.
이때 임진강 남안에 이른 적병이 감히 강을 건너지 못하자, 대장 신할이 강을 건너 적을 공격하자고 하였다. 그러자 “적이 우리 군사를 유인하고 있으니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5, 6일간 우리 군사의 힘을 길러 사기가 올라간 다음에 적을 치자.”고 하였다.
그러나 신할과 뜻이 같지 않더라도 어찌 뒤떨어질 수 있으랴 하고, 군사를 수습해 거느리고 선봉에 서서 곧 강을 건넜다.
그러나 미처 강을 다 건너기도 전에 적의 복병이 수없이 나타나 공격해와 좌위장(左衛將) 이천(李薦)이 강 상류에서 패하고, 신할도 전투 중에 전사하였다. 이때 유극량도 강을 건너 수명의 적을 죽였으나 역시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지용(智勇)을 겸비한 전략을 무시한 결과 임진강 전투가 참패로 끝난 것은 매우 애석한 일이며, 백발을 흩날리며 싸우러 나가는 모습을 바라본 군사들은 충절에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개성숭절사(崇節祠)에 제향되었고,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무의(武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