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성존(聖存), 호는 용계(龍溪) 또는 용서(龍西). 본관은 문화(文化). 경기도 포천 출신. 아버지는 동지돈녕부사 문녕군(文寧君) 유병철(柳秉喆)이다.
일찍이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68년 이항로 사후에는 그 적전(嫡傳)을 계승한 김평묵을 사사함으로써 이 양인의 학문과 사상에 깊이 경도되었다. 또한 동문 선배로 동향이던 최익현(崔益鉉), 춘천의 동문 홍재구(洪在龜) 등과 일생토록 두터운 교분을 가지고 있었다.
1876년 개항 문제를 두고 조야에서 논의가 격렬하게 일어날 때, 홍재구·유인석(柳麟錫)·윤정구(尹貞求) 등 화서학파 48인과 함께 개항 반대상소인 「경기강원양도유생논양왜정적잉청절화소(京畿江原兩道儒生論洋倭情迹仍請絶和疏)」를 올리는 등 화서학파 위정척사운동의 전면에서 활동하였다.
그 뒤 점차 일제 침략으로 인해 시국이 혼탁해지자 향리의 향적산(香積山) 아래에 은거하였다. 여기서 『척양록(斥洋錄)』을 짓는 등의 저술활동과 도학 강명을 통한 문인 양성에 일생토록 진력하였다.
그의 사상과 학문은 화서학파의 특징인 춘추대의적 의리와 명분 정신에 입각한 위정척사, 존화양이(尊華攘夷)에 철저하게 근저를 두고 있다. 그 결과 주희(朱熹)·송시열(宋時烈)·이항로 등을 특히 존숭하였다.
청일전쟁 이후 일제 침략이 가속화되는 시국상황에서는 유인석·이소응(李昭應) 등 유중교 계열의 화서학파 인물들이 적극적인 항일투쟁의 전면에 투신했던 경향과는 처신의 방편을 달리하였다. 그리하여 홍재구(洪在龜) 등과 함께 ‘자정수의’(自靖守義)의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평묵 계열의 비중 있는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학문과 행적은 사상사 혹은 독립운동사에서 주목되고 있다. 그의 문집은 간행되지 않은 채 총 114권의 방대한 수고본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중 그 대부분이 산일되고, 그 가운데 일부를 후손이 소장하고 있다.
또한 이와는 별개로 불분권(不分卷)의 문집 18책과 2책의 『능언(能言)』 등 총 20책의 미간행 수고본 문집이 한국학중앙연구원 하성문고(霞城文庫)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