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11월 14일 고희준(高羲駿)·김응두(金應斗)·정응설(鄭應卨) 등이 당국의 인가 밑에서 남작 이용태(李容泰)를 회장으로 추대하고 조직하였다.
간부는 박병철(朴炳哲)·송진옥(宋振玉)·유병룡(柳秉龍)·이풍재(李豊載) 등이며, 박영효(朴泳孝)가 이면에서 주도한 서울지방 유산계층의 단체였다.
교육진흥·경제개발·민심생활의 안정 및 사회의 진보발전 등을 표방하였으나, 친일여론 조성에 힘쓴 일종의 관제 실력양성운동단체이며, 때문에 한때 노동문제 쪽으로 관심을 나타내려 한 시기도 있었다.
1921년 8월 총독부가 미곡증산계획과 일본자본의 유치를 위하여 총독부 부설기관인 산업조사위원회를 만들자, 이 단체는 박영효 주재로 ‘조선인산업대회’를 열면서, 조선인 본위의 산업정책 확보를 주장하는 등 민족단체의 연합 시도도 있었다.
박영효의 퇴진과 친일적 성격의 노출로 인한 대중적 지지 상실, 간부들의 내분 때문에 1922∼1923년 무렵부터 유명무실한 존재로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