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원지(元之). 서윤(庶尹) 유여해(兪汝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승지 유창(兪瑒)이다. 아버지는 유회일(兪晦一)이며, 어머니는 이준구(李俊耉)의 딸이다.
음보(蔭補)로 기용되어 별검으로서 1699년(숙종 25)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정언(正言)·지평(持平)·문학(文學)·장령(掌令)을 역임하였다. 1713년 사간이 되어 호남의 연해 고을의 수령을 무신으로 임명하도록 청하였다. 또 편당(偏黨)의 폐를 없애기 위해 이조판서직을 윤번으로 임명할 것을 진언하였다.
1715년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파견되어 돌아올 때, 역관 김유기(金有基) 등이 궁각(弓角)을 몰래 사들여오다 청나라 관리에게 발각되자 그 책임으로 정사 진평군(晉平君) 이택(李澤)과 함께 파직당하였다. 곧 복직되어 집의(執義)·승지 등을 거쳐 1719년에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이어서 대사간을 거쳐 1723년(경종 3) 함경도관찰사가 되었으나 1723년(경종 3) 신임옥사로 파직, 강진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영조의 즉위로 풀려나, 1725년(영조 1) 공조참의에 이어 다시 함경도관찰사가 되었다. 이 때 북변 고을의 수령을 누구나 기피하므로, 이 곳 수령으로서 허물이 있는 자는 파직 대신 결장(決杖)으로 다스리도록 청해 실시하게 하였다.
이듬해 다시 대사간이 되고 도승지·호조참판 등을 거쳐 1727년 경기도관찰사가 되었을 때 정미환국으로 소론들이 등용되자 이를 반대하다가 파직, 문외송출(門外送黜)당하였다. 이듬해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호서소모사(湖西召募使)로 기용되고 이어서 도승지·대사간·공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시조 1수가 『청구영언』에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