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입지(立之). 유헌(柳軒)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세구(柳世龜)이다. 아버지는 사인 유감(柳堪)이며, 어머니는 창녕조씨(昌寧曺氏)로,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조윤무(曺允武)의 딸이다.
1568년(선조 1)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그 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뒤 사인(舍人)·지평(持平)·영변판관·보성군수·철산군수·공주목사 등을 역임하고, 1582년 종성부사가 되었다.
이듬해 이탕개(尼蕩介)의 난으로 1만여 명의 야인이 침입하자, 우후 장의현(張義賢), 판관 원희(元喜) 등과 이를 막으려 하였다. 그러나 성이 함락되었고, 그 책임으로 하옥되었다.
곧 풀려나 승지·개성유수를 거쳐 1586년 경상도관찰사, 1588년 전라도관찰사, 1591년 함경도관찰사를 역임하고 이듬해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이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산 속으로 피신하였다가 가토[加藤淸正] 휘하의 왜군에게 포로가 되었다. 뇌물로 매[鷹]를 바치고 탈출하였으나, 국위를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였다. 유성룡(柳成龍)의 변호로 곧 복직되어 병조참판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