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준석(俊錫) · 관옥(寬玉). 충청남도 천안 출신. 유관순의 오빠이다.
1919년 3월 12일과 15일에 걸쳐 공주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자극받은 영명학교 교사 김관회(金寬會) · 이규상(李圭商) · 현언동(玄彦東)과 졸업생 김사현(金士賢), 재학생 오익표(吳翼杓) · 안성호(安聖鎬) 및 목사 현석칠(玄錫七) 등이 3월 24일 밤 9시경, 영명학교 사택에 모여 4월 1일의 공주읍 장날을 이용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때 학생대표로서 참여해, 3월 30일 김관회로부터 학생동원과 독립선언서의 등사를 부탁받은 영명학교 조수 김수철(金洙喆)의 집에서 노명우(盧明愚) · 강윤(姜允) · 윤봉균(尹鳳均) 등과 만나 독립만세운동 계획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튿날 오후 3시경 이들과 함께 기숙사에서 독립선언서 1,000여 매를 등사하고 대형 태극기 4개를 만들었다.
4월 1일 오후 2시, 다른 학생대표들과 함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장터에서 군중에게 나누어 주고 그 선두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 날의 독립만세운동은 일제의 강력하고 신속한 제지로 좌절되었다. 결국 비교적 소규모로 전개되었을 뿐이고, 유우석은 주동자의 한 사람으로 잡혔다.
한편, 같은 날 아우내[並川] 장터의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했던 유우석의 아버지 유중권(柳重權)과 어머니 이씨(李氏)가 현장에서 순국하고 동생 유관순도 잡혀 유우석의 가정은 파멸될 지경이었다. 공주검사국으로 송치되어 동생 유관순을 잠시 만나기도 했으나, 결국 이 해 8월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1923년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재학 중 조국수호회를 조직해 활동하다가 구금되었다. 1927년에는 원산청년회(元山靑年會)를 조직, 활동하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함흥 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구형받는 등 계속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4년 양양 · 강릉에서 설악회(雪岳會)를 조직해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구속되었다.
한편, 유우석의 부인은 강원도 양양군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던 조화벽(趙和璧)으로 가족 모두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애국가족이다.
1982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