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치운(致雲), 호는 숙옹(塾翁). 아버지는 유지정(柳之程)이며, 어머니는 연일정씨(延日鄭氏)로 선략장군(宣略將軍) 정이로(鄭利老)의 딸이다. 평생을 고향인 문산(文山: 지금의 文義)에서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이괄(李适)의 난과 병자호란과 같은 난국에 처하였을 때 국가를 보위하려 하였으나 제대로 뜻을 펴지 못하였다. 현실적인 문제들에 대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대신 학문적 성취를 통하여 그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유흥룡의 시문에는 사회의 여러 모순에 대한 비판의식과 내면적인 자기성찰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전통적인 사대부의식 자체를 비판하거나 포기하지는 않고 유가적 지식인으로서의 입장을 지켰다. 유흥룡의 학문적 성향은 도학(道學)을 기반으로 당시의 훈고학적인 연구성과를 수용하였다. 끊임없는 연구생활을 통하여 많은 저술을 남겼으나 화재로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당시 유흥룡의 덕행과 학문을 높이 인정받았으며, 이른바 ‘문산부자(文山夫子)’로 널리 이름이 알려졌다. 죽은 뒤 사헌부감찰에 증직되었으며, 덕천사(德川祠)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숙옹유고(熟翁遺稿)』 4권 3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