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출생으로, 조선 말기의 승지 윤직선(尹稷善)의 손자이다. 세칭 반달할아버지로 불렸다.
교동보통학교(校洞普通學校)를 졸업한 뒤 1917년 경성 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1년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중퇴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음악학교[東京音樂學校]·도요음악학교[東洋音樂學校] 등에서 성악과 바이올린을 전공했다.
1923년 색동회 창립동인이었으며, 조선 가사를 붙인 찬송가곡이나 일본 노래뿐인 시대에 동요 창작을 시도했다. 1923년 7월 서울에서 개최된 ‘전조선소년지도자대회’에 참가해, 「동요에 대한 실재론」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기도 했다. 1924년 서울로 돌아와 동요단체 ‘다리아회’를 조직하고 어린이문화운동과 동요 창작과 작곡 운동을 전개했다.
1926년 1월 피아니스트 오인경과 만주 용정(龍井)에 가서 동흥중학교·광명중학교·광명고등여학교 음악 교원으로 교편생활을 했다. 이후 10년간 「제비 남매」·「우산 셋이 나란히」·「고기잡이」·「외나무다리」·「담모퉁이」 등을 작곡했다. 1936년 가을 서울로 돌아와 음악 활동을 했으며, 그 해 일본으로 건너가 1937년 극장 가수로 취직하며 예술단 창립을 구상했다.
1940년 서울·간도를 거쳐 중국 하얼빈예술단을 창립했으나 실패했다. 1941년 용정에서 역마차 사업을 하다가 간도성협화회(間島省協和會) 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하얼빈에서 예술 활동을 하다가 1946년 용정에서 경비대에 붙잡혀 3년형 선고를 받고 복역 중 보석으로 풀려났으며, 1947년 톈진[天津]에서 손수레를 끌다가 남한으로 탈출했다.
1924년 「반달」을 비롯해 「설날」·「까치까치 설날」·「할미꽃」·「고기잡이」·「꾀꼬리」·「옥토끼노래」 등의 창작 동요를 발표하고,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하면서 「고드름」·「따오기」 등의 동요에 곡을 붙여 동요보급운동을 전개했다. 점층수법에 의한 동요 창작과 작곡을 통해 초창기 아동문학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1950년대 초 북경(北京)에서 조선족 김정평과 그의 아버지 김철남이 「반달」을 중국어로 번역 편곡, 레코드로 취입해 30년간 애송되다가 1979년 「하얀쪽배[小白船]」라는 제목으로 중국 전국 통용 음악교과서에 수록되었다. 1956년 제1회 소파상을 수상했고, 1963년 서울교육대학 제정 ‘고마우신 선생님’에 추대되었으며, 1970년 국민훈장목련장을 받았다.
1987년 어린이의 심성계발과 순화를 목적으로 동화·동요·그림·연극 등의 활동을 조직적으로 추진하는 단체인 동심문화원(童心文化院)을 설립, 운영했으며, 1988년 사망했다. 동심문화원은 반달문화원으로 개칭하여 운영되고 있으며, 반달문화원에서는 서울미래유산 제1호인 윤극영가옥도 관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동요작곡집 『반달』(1925)과 『윤극영 111곡집』(1963)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