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명숙(鳴叔), 호는 포암(圃巖). 윤유건(尹惟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참판 윤비경(尹飛卿)이다. 아버지는 직장(直長) 윤명원(尹明遠)이며, 어머니는 김세진(金世珍)의 딸이다.
1699년(숙종 25) 생원이 되고, 1705년(숙종 3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지평(持平)·사서·정언·부수찬 등을 거쳐, 1713년 암행어사가 되었다. 이어 이조좌랑·부교리·사인·응교 등을 역임하고 승지가 되었다.
영조가 숙종 때의 구신을 등용하려 하므로, 어느 벼슬에 누구를 쓰는 것이 옳다는 식의 말을 하여 영조에게 경박한 사람으로 인정되었다. 탕평책에 반대한 이조참의 방만규(方萬規)의 상소사건에 관련되어 하옥되었다가 삭주에 귀양갔으나 곧 석방되었으며, 좌의정 민진원(閔鎭遠)에 의하여 홍문관대제학에 천거되었으나 영조가 허락하지 않았다.
1727년(영조 3) 이광좌(李光佐)가 정권을 획득한 다음 해에 정의현(旌義縣)에 귀양가서 오랫동안 안치되었다. 부제학으로 있을 때에 실록도청당상을 겸하여 『경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735년 전리(田里)에 방귀(放歸)되었다가 1741년 관직이 복구되어 공조참판이 되었다.
1743년 다시 부제학이 되고 이어 지중추부사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1757년 우빈객(右賓客)·판돈녕부사를 거쳐 1758년에 대제학이 되었다. 문장에 능하였으며 특히 소차(疏箚)에 능하였다. 저서로는 『포암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