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이지(伊之). 경주 기계현(杞溪縣) 사람이다. 1285년(충렬 11) 4월 국자시(國子試)에서 시(詩)·부(賦)로 수석 합격하였고, 1290년(충렬 16) 5월 예부시에 급제하였으며, 이듬해 남경사록(南京司錄)이 되었다. 이 때 박사는 1경(經)만을 시험하였으므로 실력이 모자라는 사람이 많아서 반드시 오경을 통달한 후에 선발하였는데 그는 천거를 받아 사문대학박사(四門大學博士)가 되었다.
충선왕 때 우헌납강릉부익선사(右獻納江陵府翊善使)가 되었다. 뒤에 충선왕은 윤신걸이 충숙왕의 총애를 받자 이를 미워하여 지영해부사(知寧海府事)로 내쳤으나 곧 선부의랑(選部議郎)에 제수되었다. 충숙왕이 즉위하자 1314년 12월 우부대언 보문각제학 지제교(右副代言寶文閣提學知製敎)를 거쳐 밀직부사 선부전서(密直副使選部典書)가 되었다.
1318년(충숙 5) 6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를 거쳐 예문관대제학으로 순성보리공신(純誠輔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한때 왕의 뜻을 거스른 일로 장형에 처해지기도 하였으나, 1320년 7월 밀직사, 1324년 2월 삼사사(三司使), 1328년 2월 좌상시(左常侍)로 원에 공녀를 바쳤으며, 이듬해 5월 충선왕의 영구를 평양에서 맞이하였으며, 1332년 첨의평리(僉議評理) 등의 주요관직을 역임하였고 기성군(杞城君)에 봉하여졌다. 1337년(충숙 복위 6) 2월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장명(莊明)이다.
두 왕 아래에서 오랫동안 인사행정을 맡았지만 일의 경중을 사사로이 판단하지 않아 당시 사람들이 어른[長者]이라고 일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