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유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한성부판윤, 형조판서, 지의금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백수(伯修)
만하(晩霞)
시호
익헌(翼憲)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74년(현종 15)
사망 연도
1737년(영조 13)
본관
해평(海平,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
주요 관직
한성부판윤|형조판서|지의금부사|지경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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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한성부판윤, 형조판서, 지의금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백수(伯修), 호는 만하(晩霞). 윤의지(尹誼之)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연(尹堧)이다. 아버지는 지평 윤세희(尹世喜)이며, 어머니는 이동규(李同揆)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02년(숙종 28) 생원이 되고, 음보로 찰방이 된 뒤 진천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1718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여러 언관직을 거쳐 1721년(경종 1) 수찬·부교리, 1722년 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723년에 나라의 기강이 문란하여 국고의 세수입이 격감되므로, 왕에게 글을 올려 토지세제를 개혁, 각 영부(營府)의 둔전(屯田)을 정리하고 세제를 확립하는 동시에 무장들의 탐학을 막고 민폐를 근절하도록 진언하였다.

1723년(경종 3) 동래부사를 역임하고, 1724년 영조가 즉위한 뒤 대사간에 오르고 부제학·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노론이 득세하자 앞서 신임옥사를 일으킨 주동자의 한 사람으로서 삭출당하였다가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재집권하자 대사간에 복직되었다. 승지를 거쳐 평안도관찰사·대사헌·예조참판이 되고, 1730년에 병조참판으로 동지 겸 사은부사(冬至兼謝恩副使)가 되어 청나라에 가던 도중 병을 얻어 되돌아왔다.

이어 한성부판윤을 거쳐 1731년 형조판서에 오르고, 1733년 지의금부사·지경연사를 겸직하였다. 이듬해 병조판서로 동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와 공조·호조·이조·예조판서를 역임하였으며, 당대의 명필로 이름이 높았다. 시호는 익헌(翼憲)이다.

참고문헌

『경종실록(景宗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사마방목(司馬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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