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백수(伯修), 호는 만하(晩霞). 윤의지(尹誼之)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연(尹堧)이다. 아버지는 지평 윤세희(尹世喜)이며, 어머니는 이동규(李同揆)의 딸이다.
1702년(숙종 28) 생원이 되고, 음보로 찰방이 된 뒤 진천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1718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여러 언관직을 거쳐 1721년(경종 1) 수찬·부교리, 1722년 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723년에 나라의 기강이 문란하여 국고의 세수입이 격감되므로, 왕에게 글을 올려 토지세제를 개혁, 각 영부(營府)의 둔전(屯田)을 정리하고 세제를 확립하는 동시에 무장들의 탐학을 막고 민폐를 근절하도록 진언하였다.
1723년(경종 3) 동래부사를 역임하고, 1724년 영조가 즉위한 뒤 대사간에 오르고 부제학·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노론이 득세하자 앞서 신임옥사를 일으킨 주동자의 한 사람으로서 삭출당하였다가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재집권하자 대사간에 복직되었다. 승지를 거쳐 평안도관찰사·대사헌·예조참판이 되고, 1730년에 병조참판으로 동지 겸 사은부사(冬至兼謝恩副使)가 되어 청나라에 가던 도중 병을 얻어 되돌아왔다.
이어 한성부판윤을 거쳐 1731년 형조판서에 오르고, 1733년 지의금부사·지경연사를 겸직하였다. 이듬해 병조판서로 동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와 공조·호조·이조·예조판서를 역임하였으며, 당대의 명필로 이름이 높았다. 시호는 익헌(翼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