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효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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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효중
윤효중
조각
인물
일제강점기 「P선생의 입상」 · 「정류」 · 「아버지 영령에 맹세한다」 등의 작품을 낸 조각가.
이칭
이칭
불재(弗齋), 伊東孝重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17년 12월 5일
사망 연도
1967년 10월 19일
본관
파평(坡平)
출생지
경기도 장단
목차
정의
일제강점기 「P선생의 입상」 · 「정류」 · 「아버지 영령에 맹세한다」 등의 작품을 낸 조각가.
생애 및 활동사항

1917년 경기도 장단에서 출생했다. 1929년 서울로 이주, 삼흥국민학교로 전학한 뒤 1931년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37년 도쿄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 1941년 12월 졸업했다. 삼흥국민학교 5학년 때 당대 최고의 조각가로 인정받던 김복진을 만났으며, 이후 김복진이 운영하는 미술연구소에서 조각을 배우기 시작했다. 도쿄미술학교에서는 세키노 세이운[關野聖韻]과 다카무라 도요치카[高村豊周]에게서 조각을 배웠다. 도쿄미술학교 재학중이던 1940년 기원2600년봉축미술전에 입선했다.

이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1941년 「P선생의 입상」과 「정류(靜流)」, 1942년에 「대지(大地)」, 「천인침(千人針)」, 1944년에 활을 당기는 목조 여인상 「현명(弦鳴)」(특선)이 계속 입선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특히 조선총독상을 수상한 「천인침(千人針)」은 태평양전쟁에 출전한 일본군의 무운장구를 기원하며, 후방에서 바느질하는 한복 입은 여인의 전신상을 새긴 작품이고, 1944년 창덕궁상을 수상한 「현명(弦鳴)」은 후방인 조선에서 여성 또한 무기를 다루는 훈련을 함으로써 전시체제의 기풍을 진작시키려는 작품이었다. 1941년 동교를 졸업 후 귀국, 대화숙(大和塾) 미술료(美術遼) 지도담당으로 참가해 전국 각지의 동상(銅像)을 수거할 때 심의와 기술자문을 담당했고, 1944년 결전미술전에 「아버지 영령에 맹세한다」를 출품했다. 1945년에는 가미가제 특공대를 기념하는 초상조각 작업을 시작했다.

해방 이후에는 조선미술건설본부에서 친일부역미술인으로 규정해 회원 자격을 주지 않았으나, 배재고등학교와 진명여자고등학교 교사를 지내면서 1947년 대한수출공예전 심사위원과 일본조각가연맹회원으로 활동했다. 1949년 홍익대학교 미술학과가 창설될 때 교수로 임용되었고, 1951년베니스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국제예술가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가했다. 창작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여 언더우드 동상, 이순신장군 소상, 세종대왕 소상(이상 1948), 이승만 흉상(1952, 스위스만국박람회 출품), 이승만 흉상(1954), 이승만박사송수탑, 민충정공상(이상 1956), 최제우 동상(1964) 등이 있다. 이외에도 전국 각지에 충혼탑과 충혼각 건설에 참여했다. 1966년 일본으로 이주, 신주쿠조각연구소(新宿彫刻硏究所)를 설립, 운영하다가 1967년 10월 19일 사망했다.

참고문헌

『친일인명사전』2(민족문제연구소, 2009)
『근대한국미술가논고』(이경성, 일지사, 1974)
『불재 윤효중 연구』(임흥순, 경희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3)
『불재 윤효중론 : 그의 생애와 예술』(황순례, 홍익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75)
『조선총독부관보』
『서울신문』(1953.4.19)
『매일신보』(1943.5.27·6.4·1944.6.2·1945.4.2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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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조성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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