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군 내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28일 읍내에서 서당생도 수 명이 독립만세를 부른 것을 시작으로, 그 뒤 4월 11일까지 각 면에서 거의 한 차례씩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음성군 내의 독립만세운동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4월 1일김을경(金乙卿)·이중곤(李重坤)·권재학(權在學)·추성렬(秋成烈)·이교필(李敎弼) 등이 주동하여 전개한 소이면 한내장터의 만세운동이다.
4월 1일 수 천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진행된 독립만세시위운동은 소이면사무소에 쇄도하여, 면장 민병식(閔秉植)에게 독립만세를 선창케 함으로써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이때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해 김을경·이중곤 등 주동자 9명이 구금되었다. 이에 시위군중은 주재소로 달려가 그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창문을 파괴하는 등 강력한 항의를 하였다. 이때 일본경찰은 군중에게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여 12명이 사망하고, 40여 명이 부상하였다.
음성읍에서는 3월 28일 오후 2시, 서당생도들을 주축으로 한 만세운동에 이어, 4월 6일 밤 9시 500여 명의 시위군중이 산 위에 봉화를 올리고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삼성면에서는 이성교(李聖敎)·임백규(林白奎)·유해길(柳海吉) 등이 주동이 되어 3월 20일 인근 산 위에 봉화를 올리며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4월 2일 오후 8시경 600여 명의 면민이 각 동리별로 만세운동을 전개하고, 천평리에 있는 면사무소에 모였다. 이어 이들은 낫과 몽둥이로 면사무소 현관과 유리창을 부수고, 경찰관주재소로 몰려가서 독립만세를 외친 뒤 새벽 2시경 해산하였다.
맹동면에서는 3월 20일 천도교인 김동환(金東煥)이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수백명의 시위군중과 봉화를 올리며 만세운동을 전개한 데 이어, 4월 2일쌍정리에서, 3일마산리(麻山里)·쌍정리에서 각각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감곡면에서는 4월 1일부터 4일까지 주촌리·문촌리 주민 수백명이 응봉산(應鳳山)과 면사무소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고, 대소면·금왕면 내송리에서는 4월 2일, 원남면에서는 4월 5일 보천장터에서, 11일주봉리에서 각각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