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안동 출신. 1919년 3월 15일 임동면 중평동 편항(鞭巷) 장터안의 공동타작장에서 유연성(柳淵成)·유교희(柳敎熙)·박재식(朴載植)·박진선(朴晉先)·유곡란(柳谷蘭)·유동수(柳東洙)·홍명성(洪明聖) 등 7명과 만나, 다음 편항장날인 21일을 기하여 거사하기로 하고 홍명성과 함께 갈전동을 담당하였다.
3월 21일 오후 2시경 500여 명의 군중이 편항에 모이자, 7명의 동지와 함께 대열의 선두에 나아가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만세운동을 지휘하였다. 이때 주재소에서 2명의 일본경찰이 출동하여 유연성을 강제로 잡아가자, 편항주재소로 달려가 그곳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다.
독립만세 대열에 대한 일본경찰의 위협사격으로 군중들의 분노가 폭발, 이강욱 등의 지휘 아래 투석과 몽둥이로 주재소와 순사의 숙사를 파괴하고 공문서도 파기하였다. 계속 임동면사무소까지 행진하여 건물을 파괴하고 문서와 비품을 파기하였다.
오후 5시경 급보를 받고 안동에서 순사부장 1명과 수비병 8명이 출동하여 독립만세운동의 주모자를 검거하는 바람에 만세시위 운동은 끝나고 말았다. 이때 검거를 피하여 숨었다가 3월 24일 오후 8시경 청파면사무소 앞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을 계속 전개하다가 잡혀 6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