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단양(丹陽). 무과에 급제하였다. 용맹하면서도 박식하고 사려가 깊어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었다. 정묘호란 때 용골성(龍骨城)의 수성좌수(守城坐首)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부사 장사준(張士俊)이 이웃 성의 패배를 보고 적에게 투항할 태도를 취하자 사태수습을 위하여 나섰다.
마침 정봉수(鄭鳳壽) 형제가 해도(海島)로부터 이르자 이들과 함께 충의를 다짐하고, 정봉수를 의병장으로 하고 자신은 참모가 되어 장사준을 참하고 용골성을 지켰다. 이로부터 성세를 크게 떨쳤으며, 싸움을 할 때마다 이김으로써 창주첨사(昌州僉使)에 제수되고 가의대부에 올랐다.
1633년(인조 11) 경중명(耿仲明)의 난에 양서(兩西)의 전선(戰船)을 총지휘 하기도 하였다. 1633년(인조 11)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