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도보(道甫), 호는 원교(圓嶠) 또는 수북(壽北). 예조판서를 지낸 진검(眞儉)의 아들이다.
소론이 영조의 등극과 더불어 실각함에 따라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였으며, 50세 되던 해인 1755년(영조 31) 소론 일파의 역모사건에 연좌되어 부령(富寧)에 유배되었다가 신지도(薪智島)로 이배(移配)되어 그 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정제두(鄭齊斗)에게 양명학(陽明學)을 배웠고, 윤순(尹淳)의 문하에서 필법을 익혔다. 시·서·화에 모두 능하였으며, 특히 글씨에서 그의 독특한 서체인 원교체(圓嶠體)를 이룩하고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림은 산수와 인물·초충(草蟲)을 잘 그렸다. 인물에서는 남송원체화풍(南宋院體畫風)의 고식(古式)을 따랐으나, 산수는 새롭게 유입된 오파(吳派)의 남종화법(南宗畫法)을 토대로 소박하면서 꾸밈없는 문인취향의 화풍을 보였다.
대표작으로 「행서4언시(行書四言詩)」(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1746년(영조 22) 오대(五代)의 인물화가 왕제한(王齊翰)을 임모하여 그렸다는 「고승간화도(高僧看畫圖)」(간송미술관 소장), 「산수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등이 있으며, 서예의 이론을 체계화시킨 『원교서결(圓嶠書訣)』을 비롯하여 『원교집선(圓嶠集選)』 등의 저서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