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여해(汝諧). 이현서(李玄緖)의 아들이다.
1853년(철종 4) 진사로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1855년 승정원의 주서에 천거되었으며, 부사과 등을 거쳐 1866년(고종 3) 이조참의가 되었다. 이듬해 명릉·예릉친제시(明陵睿陵親祭時)에 예방승지로 참여해 가자(加資)되었다.
1872년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73년 신석희(申錫禧)를 대신해 진하 겸 사은정사(進賀兼謝恩正使)로 중국에 다녀온 뒤, 청일수호조규로 중국에 있던 일본인이 모두 양이(洋夷)와 같은 옷을 입고 있다고 보고해서 당시 일본에 대한 지식이 없던 국왕과 정부 관리를 당황하게 하였다.
이 해 이조참판·형조판서를 역임하고 이듬해 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었다. 1875년 한성부판윤·우참찬을 지내고 이듬해에는 예조판서를 맡았다. 1876년 황해도관찰사가 된 뒤, 이듬해 전국이 흉년인데 황해도 지방의 방곡(防穀)이 극심해 곡물의 유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죄로 파면되었다가 다시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
경상도관찰사 재직 때 영일현의 양안(量案)이 문란해 양전(量田)을 시행하였고, 조선(漕船)을 개조하였다. 또 일본인의 절영도(絶影島) 거주를 방치한 죄로 동래부사 윤치화(尹致和), 다대첨사(多大僉使) 한우섭(韓友燮)을 파면하였다. 조선(漕船)의 일본인과의 밀무역을 적극 방지하는 등 치적을 남겨 임기가 연장되었다.
1881년 사헌부대사헌과 한성부판윤을 역임하고, 수정전(壽靜殿)의 전호(殿號)와 당호(堂號)를 서하(書下)할 때 서사관(書寫官)으로 참여하였다. 이 해 신사유람단이 귀국한 뒤 통리기무아문을 개편, 12사(司)를 7사로 할 때 이용사(理用司)의 당상경리사(堂上經理事)가 되었다.
이어 전선(典選)·어학(語學)·율례사(律例司)의 당상에 임명되었으며, 대호군·이조판서를 지냈다. 1882년 예문관제학·대사헌을 지냈다. 시호는 효문(孝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