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항의 첫째 이름이 ‘이기(李基)’이기 때문에 셋째 ‘이기(李墍)’는 집안에서 ‘이희’로 불렸을 개연성이 매우 크다고 하겠다. 그러나 세간에 이미 광범위하게 알려져 공인된 이름이 ‘이기’이므로 일단은 그에 따른다.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자는 가의(可依), 호는 송와(松窩). 이장윤(李長潤)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이질(李秩)이다. 아버지는 이지란(李之蘭)이며, 어머니는 원선(元璿)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시서에 능했다. 생원시에 이어 1555년(명종 10)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65년 장령(掌令), 1567년 수찬(修撰)을 역임한 뒤 전한(典翰)이 되어 편수관으로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71년(선조 4) 직제학이 되었다. 이듬해 좌승지에 올랐으나 노모가 원주에서 병으로 눕자 이를 봉양하기 위해 사직을 청하였다. 그러자 노모를 봉양하도록 1573년에는 강원도관찰사에 제수되었다.
이듬 해 중앙으로 돌아와 우승지가 되었다. 1578년에 다시 양주목사로 내려갔는데, 이 때 선정을 베풀었다는 사실을 경기감사가 조정에 보고했다. 1583년에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 부제학을 역임했다. 이어 장흥부사를 거쳐 1591년에는 대사간이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순화군 이보(順和君 李보)를 보필하면서 강원도에 내려가 의병을 모집하였다. 1595년 다시 부제학이 되었다. 이듬 해 대사간 · 대사헌 · 동지중추부사를 차례로 역임한 뒤 이조판서에 올랐다. 1597년에 다시 지중추부사 · 대사헌 · 지돈녕부사 · 예조판서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599년에 다시 대사헌이 되고, 이어 예조판서 · 이조판서를 역임했다. 이듬해 지돈녕부사를 끝으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죽은 뒤 1603년에 2품 이상 재신을 청백리로 뽑는데 녹선되었고, 그 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대사헌으로 있을 때 종로 네거리를 지나는데 말이 너무 말라 가지 못하고 주저앉았으나, 이기는 개의하지 않고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훗날 말이 피곤해 땅에 주저앉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대사헌의 말’이라 일컬었다고 한다. 이기는 이처럼 청빈하여 한사(寒士)나 다름없이 직책을 맡아보았다. 시호는 장정(莊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