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기동(起同).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임실 출신. 1919년 3월 23일 둔남면 오수리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오수리에서는 이미 3월 10일에 보통학교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임실군 내에서 가장 먼저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일본인 교장이 교사들과 함께 학생과 학부모에게 엄중히 당부, 그후 학생들에 의한 만세운동은 일어나지 못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기송은 오병용(吳秉鎔) · 이만의(李萬儀) 등과 연락해 장날인 3월 23일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이 날 장터에 모인 군중 앞에서 독립운동의 당위성에 대해 호소하며 독립만세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시위군중이 점점 불어나 800여 명으로 늘어나고 기세도 오르자, 경찰 주재소에서 파견된 순사가 이기송을 강제 연행하였다.
이에 격분한 80여 명의 만세시위 군중이 주재소 안으로 몰려가 이기송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 당황한 일본인 순사 무라이[村井]가 군중의 위세에 눌려 석방하였다. 만세시위 군중은 다시 2,000여 명으로 늘어났고, 시장 내의 일본인 상점을 파괴하는 등 시위가 격렬해졌다. 만세시위 대열은 면사무소로 몰려가 면장과 면서기들에게 같은 민족으로서 만세운동 대열에 동참하도록 권유하였다.
이 때 시위 군중이 주재소로 몰려가자 일본 순사들은 달아나고 순사보 고택기(高宅基)만이 총을 겨누고 위협하였는데, 그들은 총을 빼앗고 만세운동 대열에 참여하도록 강요하며 만세를 부르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날 저녁에 남원 헌병분대와 임실경찰서에서 무장한 병력이 대거 출동, 시위 대열과 대치하다 무자비하게 발포하여 시위 군중은 일단 흩어지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이튿날 새벽까지 300∼400명씩 무리를 지어 계속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기송은 다음날부터 단행된 일제의 검속에 의해 붙잡혀 7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